본문 바로가기

부부쌈하며놀기

휴대폰을 사수하라

 

 

 

 

 

 

아뿔싸!  그새 또 missed call 숫자가 빨갛게 들어와 있다.
이번엔 '3' 이다. 
남편 전화를 세 번이나 연거푸 놓친 것이다.
어찌 된 일일까, 분명히 휴대폰 벨 소리가 없었는데...


문자가 이어 들어온다.
"Call me."


단도직입이 뚝뚝 흐르는 걸 보니, 에혀 또 한마디 듣겠구나.
부랴부랴 전화를 걸어보지만 벨이 안 울리거나, 울리다 끊어지거나 하며 연결이 안 된다.
내 아이폰 접속에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다.
그럼 그렇지, 휴대폰을 지척에 두고도 내가 세 번이나 벨을 못 들었단 건 말이 안 되지.
(휴대폰 풍년인 울 집엔 집 전화가 따로 없다.)


"에긋, 접속에 또 문제가 생겨버린 모양야" 하며
장황한 설명 담긴 문자를 허겁지겁 막 보내고 나선 주방으로 나섰다.
상황이야 어떻든 오늘도 역시나 묵묵부답인 전화로 짜증 모드일지도 모를 남편이니
오랜만에 먹을 거라도 손수 마련해 분위기 조성에 선수를...

 

 

 

 

주방에 있으려니 남편 기척이 밖에서 난다.
"리턴콜 했는데 연결 안 되더라. 그래서 문자 보냈는데 받았어?" 하는 내 물음에는 아랑곳없이

"We need to resolve this issue." 
심각한 표정을 동반한 그의 저음 대답이다.


'예의 또' 휴대폰 켜놓는 걸 잊거나 무관심으로 어딘가에 내버려 뒀음이 뻔하리란 추측이 그에게서 감지되자

나도 모르게 발끈해진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내 잘못이 아니란 말야!"


"오늘일만 얘기하는 거 아니야 지금 난!"
꽥 내지르는 소리가 내 목소리 열 배쯤, 아니 백 배쯤은 더 크다.


나:  근데 왜 소리는 글케 지르는 거야?
그:  소릴 먼저 지른 사람이 누군대! 


나:  언제 내가 먼저 소리를 질렀다구 그래? (기억이 안 난다)
그:  난 처음에 조용히 말할 뿐였어, 그런데 네가 대번에 목청을 높이더라!

마치 목청크기 대회라도 열린 듯, 말을 주고받을 때마다 각각1데서블쯤씩 점점 더 커진다.


"오늘 놓친 전화는 내 잘못이 아니라니까." 
"오늘일만 가지고 내가 얘기하는 게 아니라고 했쟎오!"


그가 저리 폭발하는 데는 사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학교에 있는 시간에는 휴대폰을 꺼놓거나 진동으로 해놓을 수밖에 없는데
퇴근후 휴대폰 모드를 정상 복귀시켜 놓는 걸 내가 자꾸 깜박 잊는 거다.
그게 습관이 되다 보니 주말이든 주중이든 내 휴대폰은 정상적으로 켜져 있는 시간보단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다.
내 쪽의 필요로 휴대폰을 열어볼 때야 비로소 빨갛게 놓친 전화 숫자들.
개중엔 남편의 긴급성 문자도 종종 포함돼 있다.


그게 한두 번 아닌 상황에
"자꾸 잊게 되는걸 나더러 어쩌라구..." 란 내 쪽의 힘없는 항변이 효력 있을 리 없다.


"만에 하나 내게 비상사태가 생겨 네게 전화를 하려 해도 연결이 안 된다고 생각해 봐!
제구실도 안 하는 휴대폰, 그러려면 취소해 버리던가!"
 

오늘 일이라면 할 말이 있지만,
지난 일까지 되짚어 들먹인다면 완전 '유죄'인 내겐 할 말이 남아있지 않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지붕 날아갈 듯한 고함이라니.


"알았어. 나, 이 골칫덩이 휴대폰 더는 필요 없으니 걍 취소해버려!"
휴대폰을 그의 앞에 던져 놓고는 찬바람 팽 날리며 내 방으로 쿵쾅쿵쾅 향했다.

 

***


그렇게 초저녁부터 씩씩거리며 티비를 보다 잠이 들었나 보다.
화장실 가느라 한밤중 잠이 깼다.
거실을 살짝 기웃하니 카우치에서 웅크리며 잠든 그가 보인다.


치... 거리며 돌아서려는데 거실 탁자 위 내 출근 가방 위에 뭔가 놓여있는 듯하다.
취소해 버리라며 그 앞에 펭 던져놓고 왔던 내 휴대폰이다.


'이제 난 휴대폰 없는 비문명인으로 살거란 말이지.'
시위라도 하듯 그의 잠든 머리맡에 휑 올려놓고는 내 침실로 돌아왔다.

 



 

 

기상시간을 알리는 자명종에 잠이 깼다.
이른 작업스케쥴로 일찌감치 나갔는지 그가 안 보인다.
출근 준비를 하며 가방을 정돈하는데 어느새 다시 또 빠끔히 들어앉아 있는 내 휴대폰. 그리고 그 옆엔 또 뭔가가 놓여 있다.
어젯밤 씩씩거리며 내 방으로 향하는 내 등뒤에 얼핏 들렸던 그의 외침,
"네가 좋아하는 레버니즈 랩이야! 뜨거울 때 먹어, 식으면 맛없으니까!
치킨과 비프 중에 어떤 걸 살까나 물으려고 네게 전화 했던 거야 아까!"


'흥! 암리 이런다고 내가 휴대폰을 다시 들고 나갈 줄 알고?'
치킨랩과 휴대폰을 꺼내 거실 테이블 한가운데에 보란 듯이 던져놓고는 출근을 했다.


'정말 무슨 비상사태라도 생기면 어쩌지...' 하는 은근한 걱정을
'이젠 놓친 전화 때문에 구시렁 소리 듣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좋아'로 다독거리며 하루를 보내고.
생각 같아선 퇴근 후 집에 가지 말고 당분간 시어머니 댁에서 출.퇴근해버릴까 싶었지만,
부부간의 문제는 쥐도 새도 모르게 부부끼리 풀어야 한다는
우리 나름의 정한 결혼생활 철칙이 있었고, 그걸 지금껏 깬 적은 없다.


집에 오니 그는 아직 안 보인다.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가려니 주방 테이블에 다시 올려져 있는 아침의 그 치킨랩,

그리고 그 옆엔 내 휴대폰이 다소곳 놓여 있다.
낮에 잠시 집에 들렀던가 보다.


비시시... 웃음이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오지만
어젯밤 그의 막무가내 고함이 생각나자 다시 괘씸한 마음이 생긴다.
 

치킨랩에서 흘러나오는 냄새는 점심 쫄쫄 걸렀던 배를 점점 자극하고...
에라 모르겠다, 우걱우걱... 랩은 역시 '레버니즈 치킨 샤와르마' 여.

소스를 줄줄 흘려가며 며칠 굶은 사람 마냥 음식을 거의 끝낼 무렵 그가 들어오는 기척이 들린다.
얼른 물 한 사발 벌컥, 입을 쓱 닦고는 마치 암일도 없는 듯 티비에 빠진 시늉을 한다.


"Let's talk."
"I don't wanna talk right now."
벌떡 일어나 내 방으로 들어가서는 담요를 푹 뒤집어쓰곤 누웠다.


조금 있으려니 방문 열리는 소리가 나며 그가 들어온다.
"잠 안 자고 있는 거 나 다 알아. 일어나 봐봐." 하며 얼굴을 장난스럽게 내게 들이댄다.


일부러 흠흠 거리는 그의 모양새가 암만해도 나한테서 급히 먹은 샤와르마 흔적이 솔솔 풍기는갑다.
이러다간 내 의지와 관계없이 민망한 웃음이 툭 터져 나오기 십상이다.
억지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담요를 확 재치고는 발딱 일어나 앉았다.


"나한테 사과해야지 그치?"
에계계? 먼저 사과를 하려나 보다 했더니 그게 아닌 거네.


할 말은 해야겠다는 자세로 팔을 걷어붙이다시피 하고는,
사과라고?  우리 한번 따져보자 그럼! 으로 시작해서, 원인 제공은 내게 있단 걸 나도 모르진 않는다느니.
요즘엔 나름대로 휴대폰 켜놓는 거 잊지 않으려 노력 중이라느니.
그렇지만 버릇이란 게 어디 하루아침에 고쳐지는 것이더냐... 에 이어,


부부싸움이란 게 얼마나 조심스러운 것인지,
화해와 더불어 대부분은 사탕처럼 사르르 녹아 버리지만
어떤 말들이나 행동들은 영원히 가슴에 상처가 되기도 하고,
그것들로 조금씩 부부 관계에 금이 가면서 결국엔 와르르 무너지기도 하는거란걸
아들내미 훈계하듯 부부생활 십계명 아닌 십계명을 그에게 일장연설하고는,


"그러니까 내 말은, 어제처럼 그렇게 내게 고함을 지르는 건
나에 대해 disrespectful 하달 수 밖에 없는 거구, 그건 결국 내게 상처로 남을 수 있다는 거야.
날 존중한다면 그렇게 목청을 높이면 안되는 거지...
그러니까, 사과할 사람은 바로 자긴 셈야."


그: 그건 불공평해.  먼저 소리 지른 사람은 내가 아닌 너잖아.
나: 그래도 난 첨부터 그렇게 크게는 안 질렀다 뭐.
그: 내가 먼저 소릴 안 질렀으면 나도 그럴 일 없었을 거란 말야.


간지럼 잘 타는 내 옆구리를 간질여가며 기어코 사과를 나로부터 받아내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 소리를 버럭 지른 부분에 대해선 나도 사과를 받아내지 않을 수가 없다.


암튼 네가 사과해야 해!
아니지, 사과받을 사람은 나지!

 

 


 

 

죽어도 사과를 한 사람도, 죽어도 사과를 받아 낸 사람도 없이
결국 우리 부부의 휴대폰 사건은 그렇게 승자 미결로 끝이 났다.
사실 내 쪽의 노력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애당초 생기지 않았을 다툼이었지만 말이다.


단 한 통화라도 놓치면 죽는당!

마음 가짐으로 휴대폰 벨을 사수하려는 노력 덕분에
이후로  missed call '0'인 그야말로 휴대폰 평화시대를 구가하고 있으니,
어쩜 자신의 난리법석 고함친 그 효험에 회심의 미소를 지을 남편이겠지마는?
누가 고함이 무섭댔나, 시끄러우니까 그렇지. 크크.

 

 


- 엘리 -

'부부쌈하며놀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밥이 어쨌다구  (0) 2014.12.28
아내는 시청 중  (0) 2013.06.02
빠르고 앞서가고 쿵쾅대고  (0) 2012.12.02
남편의 잠, 잠, 잠... z z z  (0) 2012.07.25
먹고, 마시고, 배부르고, 졸립고, 또...  (0) 2012.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