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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쌈하며놀기

아내는 시청 중

 

 

 

 

 

 

 


"그거 정말 꼭 봐야겠어?"


입을 헤 벌리고 열심히 티비 속 "Hell on the Highway"에 빠져들고 있던 내 등 뒤로
불만스럽게 꽂힌 남편의 말이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고정 프로그램인 Hell on the Highway 는

토우츄럭(견인차) 운전자들이 온갖 상황에 놓인 차들을 견인해 내는 과정과 그들 일상을 리얼리티 쇼 형식으로 엮은 것인데,
눈길.빙판길 하이웨이를 벗어나 처참히 나동그라진 사고차량을
과학적 수치를 교묘히 적용해 아슬아슬 견인해 내는 베트런들의 견인기술은
적어도 내겐 주말 오후 몇 시간을 티비앞에 붙들어 매고도 남을 정도로 흥미로운 거였다.


"저것 아니라도 볼만한 프로그램들 많잖아" 라며
짝지가 마땅찮은 궁시렁을 일전에 몇 차례 티비 앞에 앉은 내게 던지며 지나친 적은 있었고,
그럴 때마다 "보기보단 흥미로와, 자기두 함 봐봐." 하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기곤 했었다.
하지만 방금 내 뒤로 던져진 그 신경질적 한마디는
지금껏 과는 달리 내 발끈성 방어본능을 가동시키기에 충분히 도전적이었다.


"이 프로그램이 어때서!"
"자극적인 사고현장 하며, 저급한 욕설 하며, 하나도 정서에 도움이 되지 못할 그런
수준 낮은 프로그램을 갑자기 너답지 않게 왜 보냐는 거지 내 말은."


거칠고 고달픈 그들 견인인들의 생활인지라 곱지 못한 언어들이 그들에게서 튀어나오긴 하지만
'18금'을 가려가며 PG 건전프로그램만을 청취해얄만큼 자라나는 성장기 새싹은 내가 아니잖은가.


"누가 저 사람들 욕설에 신경이나 쓴대? 

내게 흥미로운 건 멋대로 뒤집어지고 내팽겨진 사고차량을 과학적 수치를 적용해 각도를 재고
예기치 않은 역반응을 예견하고 대처하는 그런 계산된 과정들인 거야! 
순전히 무뇌적 프로그램만은 절대 아니라구!"


불만을 일방적으로 쏟아놓고는 쿵쾅쿵쾅 내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아버렸다.
졸지에 수준 평가절하가 된 상황이 억울하기 짝이 없지만,
이런 때 옳거니 틀리거니 대화를 이어가 봐야 서로 언성만 높아질 뿐,
일단 후퇴가 차라리 낫다.

 

분노3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티비를 화풀이라도 하듯 노려보며 씩씩거린지 얼마나 흘렀을까, 
방문이 살금 열리며 그가 들어온다.


"생각해 보니 내가 전적으로 잘못 한 것 같다. 진심으로 사과할게."
죄책감 가득한 면목없는 표정이다.


사과는 사과고, 나도 할 말은 해야겠다.
"도대체 자기한텐 내가 몇 살로 보이는 건데?"
"알아 알아. 내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거야. 용서해 줘..."


'아이도 아닌 내가 왜 자기 기준의 PG 건전프로그램만을 봐야 하는 거냐구!
설령 그 프로그램이 별 영양가 없는 것이었다 치더라도
평소 티비앞에 자주 앉아 있는 사람도 내가 아니고
그래 봐야 일주일에 한 번 오는 주말 오후를 소위 '저급'하게 탕진했기로서니!'


라는 항변이 이어 떠올랐지만
방금 한 그의 사과에 이미 모든 게 다 포함되었음이 느껴져 그만 접기로 했다.
"사과 접수할게... for World Peace. 키득."

 

**
부부싸움이란 게 잘못 치달으면 루비컨을 건너는 결과를 낳기도 하지만
잘만 마무리하면 비 온 뒤 땅이 더 굳는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하지 않나.


"자갸, Hell on the Highway 시작한다, 빨랑 와서 봐~"
이후 그의 알림서비스가 만점인 걸 보면 말이다.^

 

백허그

 

 

 

 

 

 

 

 

 

 

 

 

 

 

 

- 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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