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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놀기

악몽의 주말

 

 

 

 

지난 금요일,
중간 휴식 중 사용할 일이 있어 USB 메모리스틱을 찾아 손가방 안으로 손을 넣었다.
가방 속 내용물이라 봐야 뻔한 것들이라 눈 감고도 손을 넣으면 잡혀야 할 물건이다.
그런데 USB주머니가 만져지지 않는다.
거꾸로 탈탈 털어봐도 없다.


어디에 두었을까.
물건을 쉽게 흘리거나 잃어버리는 성격이 아닌 나 자신인 걸 알기에
잃어버렸을 거란 쪽으론 생각이 미치질 않는다.
하기야 요즘 조금만 바빴다 싶으면 정줄놓 모드를 넘나드는 내 정신머리를 생각하면
더 이상 자신할 일만도 아니지..
학생 분실물 보관함을 슬그머니 들여다보지만 있을 턱이 없다. 
교실과 캠퍼스 주차장 안팎을 이 잡듯 뒤졌지만 허탕이다.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거실 어딘가에 파란 usb 주머니가 떨어져 있는지 함 살펴봐 줘.
대답은 역시다.


아무리 생각해도 학교 아니면 집인데...
뭘 잃어버렸다 싶으면 아내부터 찾을 정도로 무언가 찾는 일에는 영 젬병인 남편 아니던가.
그래, 필시 방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 거야. 

 

 

 


일말 희망으로 오후 시간을 보내곤
퇴근하자마자 쏜살같이 집에 와 의심 가는 장소부터 살펴보기 시작했다.
없었다. 주차서부터 집안까지의 루트를 되짚어 흩어봤지만 역시나다.


정말 잃어버렸구나.
다섯 개나 되는 그 아까운 메모리스틱들을...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거다.
수년간 카피해 둔 수천 곡의 음악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일기장 같은 지극히 사적인 메모 모음이며,
아흑, 별별 포즈와 표정의 야사시 자뻑버전 셀피(셀카)들은 어쩔 것인가,
혹 학교 캠퍼스 어딘가에 떨어져 있던 걸 학생 누군가가 주워 급우들과 공유하기라도 한다면...
동화 Jack and Beanstalk의 강낭콩 줄기처럼 온갖 상상이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한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었다.
007급 개인정보가 빼곡히 들어있는 화일들에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져 왔다.
social insurance number와 employee number,
비자카드와 각종 신용카드 정보, 온라인 계좌 정보,
게다가 그간 개설된 모든 이메일의 아이디와 비번,
심지어는 카페와 블러그 로그인 정보까지 총망라된,
화장실 다녀온 얘기만 빼곤 나란 사람이 고스란히 다 들어있는
나쁜 맘 먹고 덤비려 들면 한 사람 인생을 완전히 망가지게 하고도 남을 그 모든 게 다 들어 있던 거다.

 

 


그 중요한 정보들을 왜 그리도 소홀히 다뤄 왔던가.
왜 그 많은 메모리스틱을 일상으로 소지하고 다녔던가.
일이 이 지경이 되려 했던 건지,
모든 자료를 정기적으로 따로 외장하드와 시디에 이중 삼중 카피해 보관해 오는 우리 부부임에도
'지극히 사적이고 비밀스러운'이란 이유로 몽땅 usb 에만 담아 혼자 간직해 왔다.
무엇이든 아내의 것엔 허락 없이 손대지 않는 남편인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 무엇이 그리 조심스러웠던 건지.
사고란 평소의 이성적 판단력이 오작동하는 틈을 타 생기는 것이 당연하다.


남편과 합동으로 요 며칠 들렀던 의심 가는 마켓들 여기저기에 전화를 걸어보고
직접 찾아도 가 보았지만 소득은 없었다.
툭하면 뭔가를 잃어버리고 오는 남편에게 그간 통쾌하게 날렸던 퉁박이라니...


'그 누매 그지 같은 가방이 문제였어.
빛 좋은 개살구 같은 가방만 많으면 뭐해, 죄다들 주머니가 넉넉지 않아
뭘 하나 찾으려면 가방 안을 온통 헤집느라 물건이 흘러나와도 모를 뻔 한 게 어디 한두 번인가!'


"홰 구래소.... (왜 그랬어)"
그렇게 중요한 걸 왜 뭉테기로 들고 다녔냐는 남편의 조심스런 한마디다.
갑자기 화풀이가 남편에게로 슈웅 꽂힌다.
"I knew that!  내 이런 일 생길 줄 알았어!  나 오늘 당장 새 가방 살 거 얏!"


더는 해 볼 방법이 없다.
내 야사시 셀피가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고,
여기저기 내 명의로 날라오는 어마어마한 청구서 숫자에 어쩜 난 자살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아흐흑...


보기에 안타까웠는지 남편이 한마디 위로를 건넨다.
"넘 상심하지 마, 너 월욜날 출근하면 그걸 찾게 될 것 같은 예감이 왠지 자꾸 들거든."
"찾긴 뭘 찾아, 금요일 퇴근하기 전 이미 있을만한 곳은 샅샅이 다 뒤지고 왔는데..."
남편의 빈말 위로가 지금 무슨 소용이람.

 

 


 

패닉상태에 빠져 악몽 같은 주말 며칠을 안절부절 보내고 월요일 아침을 맞았다.
학교를 향한 운전 길에도 머리는 온통 그 걱정뿐이다.
당분간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뒷수습하느라 정신없이 바빠지겠지.
은행방문에다 교육청 재정 담당도 만나 유출된 정보들을 어찌해얄지 의논해야 할 거고, 
각종 카드 분실신고는 물론, 모든 소셜넷워킹 정보와 비번을 당장 바꿔놓아야 한다.
다른 건 다 그렇다 하더라도, social insurance number 유출은 어찌 해결할 것인가,
누군가의 손에 들어간 그 번호 하나로 인해 앞으로 무슨 일들이 생길지  상상조차 하기 힘겹다.


어쨌든 오늘 은행이든 교육청이든 랩탑 들고가는 걸 잊지 말자,
혹 절차에 필요한 서류들을 업 or 다운로드 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랩탑... 랩탑...


앗, 랩탑! 
그래 맞다, 랩탑이다!
랩탑 가방에 그 USB 주머니를 넣었던 기억이 순식간에 빵! 떠올랐다.
그 며칠 전 워낙 오랜만에 잠깐 사용했던 랩탑이라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이다.


빛의 속도로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랩탑을 넣어둔 케비넛을 열었다.
아, 그 황금보물 같은 usb주머니는 거기 있었다.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로또가 당첨됐다 해도 그보단 기쁠 순 없었으리라.


나:  찾았다~~~!
남편: 거봐, 내가 뭐랬니~

 

 

 

 

 

- 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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