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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얘기저얘기

비 온 뒤

 

 

 

 

 

 

별거하기로 했다는 수화기 저편 그녀 목소리가 울음에 젖어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구 잘못인지,
그녀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고,
남편과 나는 왜냐고 묻지 않았다.
당사자들 외엔 아무도 알 수 없는 부부간 일이기에,
어차피 들어봐야 한쪽 이야기일 뿐이기에.


그래도 우리 마음은 그녀가 아닌 그 남편 편에 벌써 가 있다.
차가우리만치 이성적인 컴퓨터 엔지니어 브리티쉬 남성과
지극히 보히미언적 감성파인 연예계 분장사 캐네디언 여성이 만나 함께 연출하는 동갑내기 삶은
올록과 볼록이 만나 완벽한 하나를 이루는 모습이었다가도
±0.5도 서로의 뜨거움과 차가움을 견뎌내지 못하는 물과 기름 모드이기도 했었다.


"그 사람 너무 차가워...." 란 그녀의 불평에
"네 남편 같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네가 잘해야 해."


정말 그랬다.
갑판에 갓 잡아놓은 산 송어처럼 파닥파닥 날뛰는 다혈질 무드파 그녀를
지극히 이성적이고 차분한 모습으로 꽉 잡아 자제시킬 사람은 그밖에 없음을,
그리고 그럴 때면 길든 망아지처럼 곧 고분고분해지는 그녀임을 우린 모두 알고 있음이다.
아, 우리는 모두 그 남자의 확실한 왕펜이었다.

 

간단히 짐을 싸 일단 근처 친구 집으로 막 옮겼다며
가라앉을대로 가라앉은 그녀 쉰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흐른다.
"아이는? 그 사람이 델구 있니?"
활동영역이 동서남북인 그녀보다는 암래도 출.퇴근하는 남편 쪽이 더 낫긴 하겠지.


"엄마, 출장 아니고 별거쟎앗!"
말도 천상 유수인 이 네살배기 녀석, 뻔한 속에 잽싼 눈치를 속이기도 어렵단다.

 

 

 

 

일은 많고 몰두는 안 된다는 그녀의 착잡하고 우울한 마음을
간간한 통화와 문자를 통해 읽어내려가며
우리 부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귀 기울여 들어주는 일, 그뿐이었다.


남자 쪽 상황도 크게 다르진 않으리 싶어 통화를 시도했지만
'당분간 모든 대화는 고사하고 싶다' 는 양해 응답이 돌아왔고,
"상황이 어찌 됐던 우린 언제나 그대 편임을 알아주길..."
란 문자 하나로 우린 그의 의사를 존중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녀에게서도, 그에게서도, 이후 아무 소식을 듣지 못한 채 아쉬운 마음으로
상처를 잘 아물리고 있기만을 바란지 반년 쯤 됐을까,
문자가 왔다 그녀에게서.
'우리 다시 합칠라구...'


잘됐다, 잘한 결정이다 등의 말은 우린 하지 않았다.
충분히 숙고한 후 내린 결정일 테니 후회가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들이 다시 엄마 자리 아빠 자리로 돌아간 지 몇 개월이 지나고
우리에게로 뉴스 하나가 또 날라왔다.
'나 둘째... 가졌어...'

 

±0.5도 쯤이 낮은 남자와 높은 여자,
울 시누이 부부는 그렇게 체감온도 37도 알맞게 조율된 원앙의 모습으로
얼마 전에 건강하고 잘생긴 둘째 작품을 세상에 탄생시켰다.

 

 

**

 

 

 

 

오랜만에 아침 이슬을 렌즈에 담아 봤습니다.
렌즈 속 세상은 실물보다 훨씬 더 아름다울 때가 많다는 것을 깨닫기도 하지요...

 

 

 

 

 

 

 

 

 

 

 

 

 

 

 

 

  - 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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