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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와의 추억

케이의 억하심정

 

 

 

 

퇴근 후 집에 도착하니 거실에 남편 혼자다.


"케이는?"
"제집에."


여느 때 같으면 이제나저제나 혼자 제집에서 쥔 부부가 돌아올 때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케이를 생각해
누구든 집에 먼저 온 사람이 케이부터 제 방에서 꺼내 거실로 데려 나오곤 하는데,
오늘은 남편이 케이를 나 몰라라 하고 있는 거다.


"델구 나오지 않구?  하루종일 목이 빠져 있을 텐데."
"싫어, 당신이 가서 델구 나와."
"왜에?"
"무섭단 말야, 나만 보면 어찌나 사납게 덤비는지."


풋,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키로 보나 덩치로 보나 어디 케이랑 같은 체급이간디.
게다가 dog behaviour specialist 자격증까지 있어
황소만 한 수퍼해비급은 물론, 성격에 문제 있는 사나운 핏불들도 거뜬히 다루는 그가 말이다.


하기야 케이가 사나울 때면 증말 사납긴 하다.
나에 대한 절대 복종적이고 부드러운 태도와는 딴판으로,
남편이 제 앞을 지나치기만 해도 대번에 팔 걷어부치고 공격하는 모습을 볼라치면
번식기에 맺어준 짝이 맘에 안 들 경우 쪼아 죽이기도 한다는
전문가 말이 틀리진 않겠다 싶을 정도다.
쓰다듬어 준다고 손가락을 댔다가 남편이 피를 본 게 한두 번이던가.
 

"우씨, 넌 왜 나한테만 그러냐? 내가 뭘 어쨌다구!"

 

 

 

 

 

 


사실 케이의 남편에 대한 억하심정에는 그 이유가 있다.
애완.반려조는 대개 윙클리핑이라 하여 날개 길이를 정기적으로 짧게 잘라주는데
이는 새가 집안을 제멋대로 훨훨 휘젓고 다님으로써 생길지 모르는
예기치 않은 사고를 방지하기 위함이기도 하고,
한편 조금 더 고분고분 얌전해지는 심리 효과를 기대함이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케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인간 틈에서 키워져 인간과 사물에 대한 공포와 경계심이
애초에 없는 그런 이상적 애완조 상태라면 그깟 윙 클리핑 쯤이야 식은 죽이겠지만,
자신의 몸에 낯선 접촉을 용납지 못하는 반 야성의 방어 본능이 남아있는 케이라
몇 개월에 한 번씩 이뤄지는 윙클리핑 때마다
가위 든 남편과 케이는 사생결단전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이다.


거사를 계획하는 남편,
큰 목욕타올을 등 뒤에 살짝 감추고 미소 띈 얼굴과 상냥한 음성을 가장하며 케이에게 접근하지만,
그 미소 뒤에 깔린 남편의 미세한 긴장감을 새 특유의 그 민감한 본능으로
대번에 눈치챈 케이의 감지기에는 이미 빨간 불이 들어오고 만다.
남편을 향한 사나운 방어태세.
다가오면 죽는다!


이쯤 되면 거사는 시작도 전에 무산되는 셈이고, 남은 선택은 두 가지다.
그날은 포기하고 더 교묘한 작전으로 다른 날을 기약하던가,
아니면 이왕 들켜버린 것, 막무가내로 타올로 덮쳐버리던가.
 

푸다닥~ 꿱 꿱~!

 

 

 

 

 

 

 

동물들은 일단 눈이 가려지면 대개는 투항 모드로 바뀌기에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일단 녀석을 타올에 둘둘 쌓아놓고 볼 일이다.
일이 잘 흐른다 싶다가도 온갖 몸부림으로 인해 타올이 허술해진 틈을 타
케이가 남편 손에서 탈출하는 불상사가 생기기도 한다.
이런 날은 그냥 후퇴다.
남편의 손가락에 상처와 피까지 보게 하며 이미 죽기 살기로 탈출한 녀석 입장이라
연거푸 무리하게 시도했다간 녀석이 제풀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실지도 모를 일이니까.


다행히도 윙클리핑을 성공리에 마칠 때가 더 많다.
새장에서 해방되기 급급한 마음에 남편의 숨겨진 의도를 미처 감지하지 못하거나,
점점 완숙해지는 남편의 표정 연기에 속아 아무 의심없이 덥석 남편 손에 올라오는 것인데,
그런 케이를 타올로 후다닥 덮치기란 어렵지 않은 것.


케이 비명이 곧 잠잠해졌다면 그건 일의 순조로운 진행을 알림이라,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하는 일이란
절대 납치극에 가담한 일 없다는 듯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어서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숨죽이고 있는 것이다.


깃털에 손톱 발톱, 부리까지 손질이 모두 성공적으로 마쳐지면
남편은 멀리 침실에 숨어있는 내게 삐리릿 신호를 보내고,
주어진 역할극의 멋진 퍼포먼스를 위해 거실로 뛰쳐나간 나는
펼쳐진 타올 위에서 숨 헐떡거리며 기진맥진해 있는 케이를 향해
기양~ 구세주요 수호천사가 되어 주는 거다.


"아뉘 이론~ 예쁜 울 케이를 누가 일케 힘들게 항고야~"

 

 

 


 

이리하여 난 거저먹기로 변함없이 good guy가 되고,
또다시 bad guy 가 된 불쌍한 남편의 경력엔 케이 해코지 미수 전과가 하나 더 늘어
케이한테서 도저히 사랑을 받으려야 받을 수가 없는
루비컨 건넌 처지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도 어쩌랴,
우리 집 케이 키우기 운명적 역할분담이 그런 것이니. 흐흐.

 

 


- 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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