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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얘기저얘기

시어머니의 딜레마

 

 

 

 

가까운 지인 한 분이 자신이 렌트중인 아파트가 업그레이드 공사에 들어갔다며
잠시 기간 더부살이 신세를 시어머니에게 청해오셨다 한다.
평소 우리 가족과도 친밀히 지내온 성격 살가운 그녀이고,
재작년 짝을 잃은 후로 심적 외로움을 종종 겪는 자신에게 의지가 될 수도 있겠다 싶어
시어머니는 흔쾌히 오케이를 하셨나 보다.


그렇게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고...
길어야 두 달일 거라는 예상을 뒤엎고 그녀의 거주가 넉 달이 넘어가자
시어머니는 살며시 우리 부부를 불러 불편한 심정을 털어놓으신다.


말한 두 달이 훌쩍 넘어가도록 가타부타 말이 없는 친구에게
시어머니는 조심스럽게 그 연유를 물으셨다는데
"더딘 공사 진척으로 한 몇 달 더 걸릴 것 같다"는 게 그녀의 대답이었다고.


아무리 거리낌 없던 사이라지만 가족 아닌 누군가와
기한 불분명한 동거를 해야 한다는 것에 시어머니는 마음이 편치 않다.


시어머니보다 연배가 어린 그 지인 역시 남편과 사별한 여성이다.
결혼해 가정을 꾸린 아들 내외가 하나 있지만
자신의 일터도 그렇고, 아들네로 들어갈 상황은 아니었던가 보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그분 처지가 저렇다는데..."


병원 일에서 은퇴하신 지 얼마 안 되는 시어머니는
이후 여러 사회활동으로 오히려 은퇴 전보다 더 바쁜 스케쥴을 밖에서 보내는 터에
늦은 밤에서야 귀가하곤 하는 중인데,
대부분 집에는 혼자 있는 그 지인뿐이라, 그렇지 않았으면 다 꺼져있을 모든 하우스 시설이

그녀 하나로 인해 풀가동 되는 셈이니
들어가지 않아도 됐을 유지비가 계속해서 발생함도 무시할 일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주거비를 내라 할 순 없는 일이고, 또 그럴 마음은 없어."
좋은 의도로 시작한 배려가 자칫 악연으로 끝날지도 모를 시어머니의 고심이었다.

 

 

 

 

 

 

 

 

이후 두 달쯤이 더 지나,
주말에 잠시 들른 시어머니 댁에 왠지 냉랭함이 흐른다.  이유를 물었다.


공사 중이라는 그 친구분 아파트는 시어머니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고,
마침 그 아파트 앞을 지나는 길이었던 시어머니는
어찌 된 상황인지 좀 물어나 봐야겠단 마음으로 아파트 관리인을 만났다는데,
공사 상황을 물으니
'아파트 관리부 측과 보험회사, 공사업체, 삼자 간의 계약 오류로 인해 공사가 중단된 상태'라며,
'공사가 언제 재개되고 또 이후 일 년일지 이 년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라 하더란다.


그저 '한 몇 달 더'란 말로 상황을 덮으려 한 듯한 그녀에게서 실망감을 느낀 시어머니,
그리고 자신 말이 못 미더워 직접 아파트 관리자를 만나 사실 확인을 하려 했느냐며 화가 난 친구,
둘은 나름의 서운함으로 그렇게 서로에게 찬바람을 날리고 있었다.


상황을 접수한 나와 남편의 의견도 갈렸다.
짝: 직접 찾아가 사실 확인을 하려던 엄마가 잘못 한 거지. 그건 월권이야. 친구분이 열 받으실 만해요.
나: 우연히 지나던 길이었다시잖아. 애초부터 자초지종을 숨긴 사람이 잘못한 거지요.


'애초에 그 친구분께서 시어머니와 마주 앉아
솔직히 상황 설명을 한 후 배려를 청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부분에선 우리 부부의 같은 아쉬움이 있었다.

 

 

 

 

 

 

 


이제 7, 8개월이 돼가는데 여전히 그녀는 시어머니와 동거 중이다.
공사가 재개되었는지, 그렇다면 앞으로 얼마나 걸리는 건지
여전히 그녀는 아무것도 업데이트해주지 않는다.


공사 기간 동안은 임차료 지급이 중단 되기에
그 비용으로 다른 임시 거처를 마련하면 여러모로 훨씬 좋으련만
굳이 시어머니와의 불편한 동거를 고집하는 확실한 이유를 우린 알 수가 없다.


받아들이진 않았어도 매달 어느 정도의 생활비를 그녀가 제시했던 거로 봐서는
애초 무임승차를 바란 동거는 아니었던 듯하지만,
다른 거처를 온전히 마련해 모든 유지비를 홀로 감당하기엔
어떤 사연이 있든 그리 넉넉한 자금 사정은 또 아닐 것이란 게 우리의 조심스런 추측이기도 하다.
그게 아니라면, 고집스런 동거로라도 홀로인 외로움에서 벗어나고팠거나,
혹은, 어차피 거칠 것 없는 여유로운 공간에서 자신 한 사람의 더부살이가
무슨 큰 불편함이 될꼬...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프라이버시가 없어진 동거의 불편함도 불편함이지만,
영국과 미국의 두 딸 내외가 이로 인해 차일피일 방문을 미루고 있는 것도 신경 쓰일 일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시간만 나면 거실 티비 앞에 앉아 대개 꾸벅꾸벅 졸다 잠이 드는 그녀의 축 처진 에너지로 인해
평소 활기찬 자신의 무드마저 영향을 크게 받는 것이 시어머니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


시어머니가 고심 끝에 드디어 그녀에게 선언한다,
석달 내로 거처를 옮겨주어야 하겠어.


석 달이란 최후통첩에도 묵묵부답,
다른 거처 물색을 위한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무대책 그 친구를 보며
시어머니는 벌써부터 딜레마에 빠진 듯하다.


'망설이고 고민할 게 뭐 저리 있으실까...' 싶지만, 그건 우리 세대의 정서일 것이다.
행여 오랜 우정에 금이 가 서로 등 돌리는 최악으로 변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우려,
아들네를 두고 굳이 친구와의 불편한 동거를 고집하는 그 사정 오죽할까 싶은 안쓰러움은
평소 그녀의 직선적이고 단도직입적인 성격과는 별개의 것일 게 분명하다.

 

 

 

 

 

 

 

 

 

 

 

 

알면 알수록 진가가 드러나는 사람이 있고, 알수록 실망스러운 사람이 있듯,
가까이 있을수록 유대가 돈독해지는 인연이 있는가 하면
시종일관 적당한 간격을 두었을 때가 더 나은 관계가 있다.


오류의 무게중심이 어느 쪽에 가 있든,
누군가를 내 삶 공간에 들여놓는 일, 내가 누군가의 공간에 합류하는 일,
그저 당시 친분만으로 흔쾌히 오케이 하기 전에 한 번 더 신중히 생각해 볼 일일 듯도 하다.


시어머니의 주말 점심 초대, 모두 식탁에 둘러앉았는데 그녀가 뜬금없이 나갈 채비를 한다.
"저희랑 점심 함께 하시쟎구선요?"
"고맙지만 괜찮아, 외출 약속이 생각나서."


'불편한 게지...'


교감이 이미 끊어져 버린 관계는 오해를 낳기도 쉬운 법이다.

 

 

- 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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