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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얘기저얘기

황당한 '빠꾸'

 

 

 

며칠 전, 몇 가지 살 것이 있어 남편과 차를 몰고 근처 수퍼마켓으로 향했다.
마켓 지하 입구로 바로 연결되는 주차장은 지하 3층에 있었고,
우리 앞엔 가는 내내 어느 SUV가 있었다.

 

그런데 앞서가는 그 차가 그렇게 느릴 수가 없다.
워낙 자주 가는 마켓이라 거칠 것 없는 우리 스피드를 고려 하더라도,
그 차는 느려도 너무 느린 거다.
뿐인가, 한 모퉁이 돌 때마다 급정거를 하곤 I have all day라 듯 한참을 서 있는 것이
대체 운전자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운전 연습생인가? 아님, 초보 운전자?
차 엉덩이에 빨간 'L'(Learner 연습생) 혹은 초록 'N'(Novice 초보) 스티커가
붙어 있어야 할 텐데 아무 표시도 없는 걸 보면 그도 아닌듯.


대낮  운전?  아니면운전?
got high?
아빠 차 몰래 끌고 나온 무면허 꼬마?


애써 농담조의 이런저런 추측을 우리 부부 해보며 키득거려도 보지만
기실 남편과 나는 인내의 꼭짓점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4-way 갈림길에서 역시나 엉거주춤 서 있는 틈을 타 추월을 시도하려는 찰라
차가 갑자기 우리 쪽으로 방향을 틀며 막는다.
헐, $%^&*@!??


걍 참자, 뭐 어떤 사정이 있는 걸지도 모르는 거니까.
선택의 여지 없이 다시 그 꽁무니를 어기적어기적... 쿨럭.... 어기적어기적... 쿨럭... 따라가려니
아, 마켓 입구, 고지가 저기 보인다.


이제 마지막 오른쪽으로 꺾기만 하면 되는 거다...싶은 순간,
앞차가 딱 멈춰서는 움직이질 않는다.
그러더니 갑자기 후진등에 불이 켜지며 우리를 향해 후진을  시작하는 게 아닌가?


어...어...
그냥 있다간 그대로 받힐 상황이다.


혼비백산한 우리도 덩달아 부랴부랴 차를 후진시키며 경적을 빠아앙! 크게 울렸다.
하지만 차는 아랑곳도 하지 않은 채 우릴 향해 후진을 계속한다.
우리를 뒤따르던 차도 영문을 모르는 채 우리에게 경고음을 마구 쏜다.
앞.뒤차에 끼어 더는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다.


툭.
결국, 우주선 docking 하듯 우리 차에 스킨쉽을 하고서야 앞차의 후진이 멈췄다.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SUV 는 당당히 다시 앞으로 나가기 시작하고
우회전 후 유유히 주차공간 속으로 차를 들여보낸다.


차 앞부분을 살펴보니 손톱만 한 흠집이 보인다.
Wear-and-tear insurance로 처리하면 되긴 하지만, 어쨌든 이건 아니지 않나.


건너편에 주차를 마치고 걸어 나오는 그 차 운전자를 향해 걸어갔다.
차에서 나온 사람은 80세도 훌쩍 넘어 뵈시는 꾸부정한 할아버지였다.
갑자기 할 말이 막히는 기분이다.
하지만 상대를 향해 시니어 예우를 갖출 우리 기분 또한 아닌 거다.


"무슨 운전을 그렇게 하십니까?"


"???..."
그런데 그 노인은 뭔 뜬금없는 소리냐는 듯 우릴 향해 눈만 끔벅거리신다?


"후진을 그렇게 막무가내로 하시면 어쩌자는 거냐구요!"
"???..."


"하마터면 저희 차가 크게 받힐 뻔했단 말입니다!"
"(눈 끔벅끔벅) 안 받혔으면... 다행 아니요?"
"아니 그걸 말씀이라고 하세요?"


알고 보니, 뒤에서 우리 차가 내내 따라오고 있단 것도 몰랐고,
후진 당시 우리가 뒤에 있었단 것도,
수많은 차가 경적을 뿌아앙 울려댄 것도, 우리 차에 접촉 사고를 낸 것도
Three wise monkeys인양 아무것도 못 듣고 못 본 채 그저 전진 또 전진하셨다는 야그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백미러(rear mirror)도 안 보고 운전하시나 싶지만,
사실 그의 연세를 대충 짐작건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오감이 젊은이들 같길 기대하긴 무리겠다 싶어지는 거다.


"그랬다면 미안하오... "
그의 한마디에 더는 할말 없어진 우리, 그냥 보내드릴밖에.


***

마켓 안을 걸으며 물건을 집다 곁에 있던 남편과 눈이 마주쳤다.
거의 동시에 "연세도 많은 분한테... "
그의 희끗희끗 머리와 꾸부정한 등을 생각하며
왠지 마음 한구석에 죄책감 같은 것이 내내 자리 잡은 것이다.


'아냐, 그래도 그렇지. 안전 운전 능력이 안 되는 상황이라면
스스로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애초에 운전대를 잡으시면 안 되는 거였지.'


하마터면 일어날 뻔했던 사고에 우리 부부 가슴 졸인 걸 생각하면 
우리의 목청 높임이 결코 지나친 건 아니었을 거란 자위를 하면서도 왠지 마음이 불편해 오는 거다.


마켓 어디쯤엔가 계실 그 할아버지를 찾아 기웃거리다 드디어 그를 발견했다.
"저희가 다소 무례했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너무 놀랐던 건 사실이거든요."
"아니요, 내가 왜 아무것도 못 보고 못 들었는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반응으로 봐선 여전히 운전대를 포기하시진 않을 듯했지만,
오늘 일로 인해 조금 더 조심 운전을 하실 수 있다면 그것으로서
우리가 목청 높인 보람은 충분히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

 

 

 

 

 

 

 

 

 

 

 

 

 

 

 

 

 

 

 

 

 

 

 

 

 


현재 이곳 캐나다 비씨주 도로안전법에 따르면,
80세가 되는 운전자들은 운전 적합성을 확인받기 위한 건강검진을 요청하는 통지를 받게 되며,
이후 2년마다 적합성 테스트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매 검진 $75~$400에 이르는 비용도 그렇고,
운전면허증을 잃게 되면 그저 바깥출입 못 하는 방콕 신세로 전락하기 십상 아니겠냐며
이는 "ageism"(노인차별)이라며 반대를 외치는 옹호단체도 있다.


이에 대해 자동차 관계처장은
"80세 이상 운전자의 건강검진 의무화는 이곳 캐나다 뿐만 아니라
세계 대부분 나라의 그것과도 일치하는 요구사항"일 뿐더러,
"이 정책을 재검토한 비씨주 인권심사위원회에서도
80세에 이르는 모든 운전자의 운전능력 평가방침은 도로 안전 의무사항과 일치한다고 밝혔다"며
법무부에 제출된 노인 옹호단체의 제안에 대한 답변을 서면 제출했다.


이곳 도로안전 기관 자료에 의하면,
충돌사고 70%가량이 80세 이상의 운전자에 그 책임이 있으며,
이들 충돌사고로 인해 사망할 확률 또한 훨씬 높다고 한다.
관계기관의 말처럼 고령이라고 해서 모두가 운전능력에 영향을 줄 결함을 갖게 되는 건 아니기에
운전 지속 여부를 결정하는 데 있어 나이가 기준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이번 내 경험을 그 예로 적어도 안전 운전에 필요한 운전자의 신체적 인지적 건강이 근거 되어야 함은
분명 필요한 일 아닐까 한다.

 

 

 

 

- 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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