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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얘기저얘기

누굴탓하랴, 사전공고를 잘 읽었어야지




어느 하이라이즈 아파트에서 살 때의 일이다.
 

하루는 관리 게시판에 욕실 워터파이프를 모두 새 모델로 교체한다는 빌딩매니저의 노티스가
층별로 각각 교체날짜까지 지정되어 붙어 있었다.
 

두주쯤인가가 지나서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그 전날 밤 미처 끝마치지 못한 작업이 있어 그날 아침 일찍부터
모니터 속에 몸이 반쯤 들어가 있다시피 하던 중였는데 낙낙소리가 나는 거다. 
파이프 교체작업팀이 도착한 것.
 

욕실로 그들을 바삐 안내한 후, 작업모니터 앞으로 부랴부랴 되돌아가
하던 일에 다시 몰두하기 시작했다.
 

사실 파이프 교체 실시 바로 직전
해당 부근 욕실용품들을 미리 치워놓으라는 매니저의 잠시 안내방송이 있긴 했었지만

 뭐 워터파이프가 '나 여기, 나 저기' 란 팻말을 내 눈앞에 자상히 흔들어 대고 있던 것도 아니고.
 

바쁜 중에 얼핏 생각나는 거라곤 오직 욕조파이프 한 곳뿐.
욕조 안에 치울 물건이란 그저 욕조 벽에 대롱대롱 매달린 속세의 때를
말끔히 벅벅 밀어내는 신성한 목욕 타올 등,
눈에 띄는 이런저런 몇 가지들을 대충 치웠다.
 

암튼 다시 모니터 속에 얼굴을 파묻고 있느라 방금 작업팀이 들어간,
고개만 조금 돌리면 바로 보이는
바로 뒤쪽 욕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까닭이 있나.
 

대략 두어 시간쯤 흘렀을까.
작업팀의 들락날락 발소리, 파이프에서 물 쏟아지는 소리,
욕조 벽 일부를 허무는 듯한 뚝딱뚝딱 소리.. 에 무감각해져 있을 때쯤,
누군가 내 등에 노크를 하는 것이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빌딩 매니저다.
 

그 얼굴에 모니터 칼라가 겹쳐져 눈이 아직도 뱅뱅 돌고 있는 내게
방긋방긋 맘씨 좋은 아저씨 웃음으로 매니저 왈,
"욕실 파이프교체 과정에서 '사.소.한' 문제가 생겼다.
하지만 마무리 잘하고 가게 할테니 그리 신경 쓰진 않아도 될 것" 이라고.
 

그런 사소한 일에까지 직접 오셔서까지 설명해 주시고
역시 매니저네 매니저야.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이젠 한숨 좀 돌리고 해야겠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문 꼭 닫힌 욕실 안이 너무 잠잠한 것 같네...
 

똑똑...
그런데 안에서 아무 응답이 없다.
 

후다닥 작업 끝내고 벌써 가버린 건가...
욕실 문을 살그머니 밀고 고개를 살짝 디밀었다.
 
헉....! 이게 무슨 일인가.
욕실 안은 온통 물... 물... 물바다가 되어 있었다.

 
그 위로 남자 오리 세 명이 동동 떠다니며
열심히 물을 바가지로 퍼내고 있었던 거다.
옆에는 냉장고 반 만한 그들의 플래스틱 통이 놓여 있었고,
얼핏 보니 '낯익은' 물건들이 그 속에 들어가 있었다.
내 물건들 같은데...?  오잉?!

 
그간 깐깐을 부리며 모은 동전으로 특별세일 때 줄 서서
힘들게 사재기해놓은 그 많은 화장지며 휴지며, 라이트벌브에 면봉에...
등등이 모두 흠뻑 물에 젖은 채 산더미로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게 아닌가!

 
이럴 수가!

 
눈 튀 나오기 직전인 내 얼굴에 저들도 놀랬던지 조심스럽게 사태보고를 내게 한다.
사실은 욕조뿐만 아니라 세면대 파이프도 교체대상이었기에
그 워터파이프가 연결된 세면대 밑의 물품보관함 물건들도
만약을 대비해서 모두 치워두었어야 했는데 그걸 내가 간과했던 거란다.
파이프 교체 시 드물게 발생할지도 모를 그 만약의 사태가 결국
운나쁘게도 내 차례에서 일이 나버린 거다.
 

자기들이 책임질 일 하나 없단 뉘앙스로
'그러게 미리 치워놨으면 이런 일 없었지요.'

 
세상에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기막힌 얼굴로 멀뚱멀뚱 서 있는 내게
그 문제의 세면대 보관함 문을 활짝 열어 재치더니,
"이것들은 어떻게 할까요?"

 
축 젖어 있는 타올들이며 화장품들이며 개인 위생용품은 그렇다 치고,
나란히 물에 반쯤 잠겨있는 막 새로 장만한 헤어드라이어에 시선이 미치자,
으아악...

 
깨끗이 마무리 잘하고 갈 테니 마음 놓으라는 그들의 억지 위로가
그저 먹먹하게 들릴 뿐이었다.
이런 지경인데도 날더러 사.소.한 문제가 발생했을 뿐이니 '걱정 말라'고?







 
당장 라비 관리실로 달려 내려갔다,
그리곤 두말없이 손해배상을 요구했냐고...?
 

왠걸...
매니저가 손가락으로 꼭꼭 짚어가며 다시 한 번 상기시킨
"입주자 사전 주의사항의 부적절한 조처로 인한 피해 결과에 대해선 하등의 책임 없음."
의 마지막 줄에 나 혼자 가슴 치며 말줄임표 닷닷닷... 으로 힘없이 내 방으로 터벅터벅.
 

그래도 그렇지, 물에 빠진 화장지며 휴지며 온갖 종이제품을
그 더러운 쓰레기통에만 안 집어넣었어도
꾹꾹 짜서 말려 쓸 방법이 있었을 텐데...

 
에혀, 매니저 노티스 내용 중에서 욕조파이프만 읽고
세면대파이프 부분은 대충 통과 통과한 내가 잘못이지
누굴 탓하겠어...




 
- 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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