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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쌈하며놀기

비닐봉지 블루스

 

 

컵누들, 쏘시지, 감자칩, 비프저키, 파스타, 파인애플브레드, Egg Tart,...
제법 꽉 찬 샤핑바구니를 들고 계산대 줄에 섰다.
가짓수를 봐선 비닐봉지 세 개는 족히 필요할 것 같았지만
남편에겐 그냥 "두 개만 달라고 하자" 했다.


"세 개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냐, 두 개로 충분할 거야. 글구 여기 봉지는 크기가 커서 괜찮아."


그깟 비닐봉지 하나에 몇 푼이나 된다고 이러나 싶지만,
그 몇 푼 안 되는 것에 그리 인색하게 되는 건
샤핑 때마다 생긴 봉지들이 이미 집에 처치 곤란으로 넘쳐난 탓이기도 하고,
비닐봉지 값을 꼬박꼬박 받는 이 마켓에 올 땐
차 트렁크 안에 비치된 샤핑 백들을 일부러 챙겨오리란 걸
종종 깜박하는 자책이기도 할 것이지만,
기실은, 그냥 봉짓값이 아까운 거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고,
플래스틱백 몇 개 줄까나 하는 캐셔 물음에 날 한번 힐끗 쳐다보던 남편이
마지못한 듯 "Two, please." 한다.


두 개의 비닐봉지가 모자라는 참변이 생겨선 안 되겠기에
캐셔의 스캔을 거친 물건들을 '내가 하겠노라' 자청하며
한치의 공간이라도 낭비될 새라 플래스틱 백 안으로 물건들을 꾸욱 꾹 눌러 넣기 시작했다.
남편에게 두 개면 충분하다고 한 내 장담에 면이 서야 하는 것인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급기야 봉지 군데군데 뿅뿅 구멍이 나며
그 사이로 물건들 엉덩이가 삐죽 튀어나온다.


나, 민망스런 마음에 캐셔를 쳐다보며
"아휴, 녀석들이 덥다고 엉덩이를 밖으로..."

 

뒤따라 계산을 하던 남편이 뜬금없이 캐셔에게 봉지 하나에 얼마나 받는지를 묻는다
"4센트요. 봉지 하나 더 드릴까요?"


됐다며 계산을 막 마치고 있는 남편에게
아직도 갈 곳 없는 egg tart 한 박스를 가리키며
"요건 걍 자기가 손으로 들구 와, 알찌?"


주문인지 부탁인지를 남기곤
언제라도 해체될 듯 옆구리 터진 샤핑봉지를 아슬아슬 받쳐 들며 차로 향했다.


"두 개로도 충분....했지?" 
남편의 태풍 전야 고요함을 아직도 감지 못한 눈치 -5단 아내,


"4센트 아껴서 만족해?! 이게 대체 몇 번째야!"
남편이 드디어 폭발했다.

 

 

 

 

 

 

 

 

 

 

 

 

 


 

결국 터질 것이 터진 셈이랄까,
샤핑봉지가 아니라도 이런 나의 비이성적일만치의 sweating the small stuff 으로 인한
우리 부부의 톤 낮은 언쟁은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잘못 청구된 물건값에
고작 몇 불 혹은 몇 센트 환불받겠다고 다시 그 험한 교통체증 속으로
돌진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티격태격했던 적 하며,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두 마켓을
4x50m shuttle-run (왕복달리기) 해대며 가격 비교를 하는 내 성화에
남편 진이 있는 대로 빠진 적도 있다.
 

하지만, 개스비가 더 들겠다며 구시렁거리면서도 남편은
차 머리를 돌려 아내의 회항 요청에 줄곧 협조해왔다.
이번엔 해도 너무한다 싶었던가 보다.  
 

봉짓값 4센트를 둔 내 '체감 가치'는 남편의 것과 많이 다르다.
그렇다고 춥고 배고프며 커 온 건 아니지만
당신 남편의 수차례 시행착오로 허리띠를 시시때때 졸라매야 했던
친정어머니의 그 꼼꼼한 씀씀이가 그 딸내미에게도 무의식중 스며들어버린 걸까,
'지나친 절제로 오늘을 즐기지 못하고 맞는 미래가 꼭 행복한 건 아니다'는
남편 말에 백번 수긍을 하면서도
어쩌지 못하고 한술더 떠 지지리 궁상을 떠는 가끔의 내 모습에
스스로 짜증이 날 때마저 있다.

 

 

 

 

 

 

 

 

 

 

 

 

 

 

 

"미안해.  내가 지나쳤어..."
민낯이 부끄럽다.


화를 삭이려는 듯 내내 묵묵부답이던 남편이 집에 도착해서야 입을 연다.
"거서 자기 민망할까 봐 아무 소리 안 했지만, 나 정말 화 많이 났었어.
4센트 더 주고 우리 몸과 마음 평화를 살 수도 있었잖아, 그치?”


'뭐시 중헌디'
그래 맞다.

 

 

 

후기:

두 주쯤 지났을까, 또다시 샤핑을 마친 우리, 계산대 앞에 섰다.
그런데 이긋, 차 트렁크에서 샤핑백 챙겨오는 걸 또! 잊은 거다.
지난번 레슨을 회상하며 넉넉히 비닐봉지 "3개!"를 외치려던 순간,


"걍 2개만 주세요."
남편이 내게 눈 찡긋하며 선수를 친다.

^ . ^


 

 

 

- 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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