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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랑교육이랑

빗나간 부정

 

 

 

 

 

 

 

과연 1호 희생자가 누굴까에 모두 귀를 쫑긋하며 
김영란법을 통한 '투명사회'로의 도약을 위해
적잖은 몸살을 앓고 있는 요즘 우리의 한국인가보다.


그 나라가, 그 사회가 아무리 깨끗하고 투명하다 해도
물을 흐리는 몇 마리 미꾸라지들은 어디든 있기 마련인지,
있을 수 없는 황당한 사건이 언젠가 일터에서 있었다.


 

 

 

 

 

 

 

12학년(고3) 한국인 학생의 학부모가 상담을 신청해 왔다.
한국인일 경우 특히 자녀의 학습 관련 외의 보다 사적인 고민일 경우가 많기에
상대적으로 조심스럽고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간단한 성적표 리뷰가 마치 정해진 격식처럼 지나고
"내 딸 수지(가명)가 독일어 클래스를 듣는데요..."
하며 학생 부친의 his & her side of the story 가 시작된다.


9학년(중3) 때부터 해당 교사의 독일어 수업을 줄곧 들어왔고,
교사는 아이의 독일어 실력을 급우들 앞에서 공공연히 칭찬해줄 만큼
아이를 꽤 예뻐했다 한다.


그러다 11학년(고2)이 되던 그해 어느 날,
수지가 아빠에게 말하길, 선생님이 자길 불러선
'사고픈 수천 불짜리 명품가방이 하나 있는데, 돈이 한참 모자라 못 샀다' 하더란다.
그게 노골적으로 돈을 달라는 의도가 아니고 뭐겠냐는 거다.
자신도 딸과 같은 생각이라는 거다.


예에, 뭐라구요! 정말요? 설마요, 말도 안 돼...
머리를 둔기로 한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었다.


선생이 돈 얘기를 뜬금없이 그 아이한테 했다는 것도 나로선 이해가 안가고,
더구나 '명품'개념조차 없는 이곳 사회에서
그같이 괜찮은 교사가 '명품'을 들먹였다는 사실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냥 못들은 걸로 하고 넘어갔지요. 그런데... " 그가 말을 잇는다.


그 일이 있던 후부터 아이에 대한 교사의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는 거다.
곧잘 받던 학점 A가 B로 떨어졌고,
학급 토론 시 그래머가 맞지 않았다며 급우들 앞에서 망신을 주는가 하면,
"정성 들여 해간 숙제를 두고 '그거 네가 직접 한 게 아닌 것 같다'며 내동댕이치기까지 하더래요."


적어도 동료로서 줄곧 흠모해 오던 그의 성품을 내가 익히 알기에
더욱 믿기 힘든 얘기였다.


이곳에서도 익히 알려진 한국인들의 '명품'사랑 아니던가,
그를 빗대어 말하려던 교사의 의도를 혹 아이가 자기 방식대로 잘못 해석했을 확률도 전혀 없다곤 할 수 없다.
그 상황에서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말 되는 상상이란 그것뿐이니까.
 

"그래서 말인데요," 그가 한참을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암래도 제가 그 선생님께 원하는 돈을 주는 게 낫지 않을는지..."


"예에?" 기가 막힐 일이다.
"저도 그게 옳은 일은 아니라 생각하지만, 이번 대학 내신성적이 걸린 문제라..."
"그렇다면, 더욱 그래선 안 되는 거지요."


자신의 추측만을 믿고 교사에게 돈을 건넸다 치자,
도덕적 이슈를 차치하고라도,
추측이 빗나가 교사가 뇌물을 공식적으로 문제 삼는다면 그 뒷감당을 어찌할 것이며,
추측이 맞더라도 나중에 부당한 학점 문제가 생겼을 경우
부모로서 학교 측에 어찌 정정당당 따질 것인가.
촌지를 줬는데도 점수를 제대로 안 올려줍디다! 라 할 것인가?


돈을 건네는 쪽으로 마음 굳힌 듯한 그에게 상담을 마무리하며 못을 박았다.
"절대로 그렇게 하시면 안됩니다. 큰일난다는 말씀 분명히 드립니다.
그리 아실 줄 믿겠습니다."

 

 

 

 

 

 

 

 

 

 

그해 겨울 방학 2주가 지나고 개학 며칠째 되던 날, 그 학부모가 또 찾아왔다.
이런저런 형식적인 안부 인사가 오가고
드디어 그가 말을 꺼내려는데 그 주저하는 모습이 영 심상치 않다.
"혹 그때 그 얘기라면 그만하시길요. 제가 해드릴 말은 더는 없습니다."


직무상 주어지는 딜레마가 있다.
상담자로서 학생 프라이버시와 관련된 '컨피덴셜' 유지 의무와,
비리나 인권, 규정위반 등을 좌시할 수 없는 교사로서의 보고 의무,
두 가지 상충한 성격들이 한 사안에 들어있을 땐 고민을 아니 할 수 없다.


그가 사고를 이미 치고 말았다는 얘기라도 내게 전한다면
이제 내게 남은 일이란 상부에 보고하는 것뿐,

Go 아니면 Stop 이다.


'이제부터의 대화는 비공개가 될 수 없을 것'이며,
'학교 고위부에 보고되길 원하면 계속 얘기하시라'는 말이 내 입에서 차갑게 나오고,
그는 절대 아니라며 무색한 얼굴로 자리를 뜬다.


그리고 그다음 주,
첫 수업 준비를 하고 있는데 수지가 놀란 얼굴로 내게 달려왔다.
무슨 일인지 교장실에서 자신을 지금 보잔 다는 거다.


"무슨 일이 됐든 넌 있는 사실대로만 말씀드리면 되는 거야. 그럼 겁날 거 없어."
서로 모른 척하지만 '그 일' 때문일 거란 걸 나도 아이도 알고 있음이다.


'그 일이 어떻게 위까지 올라갔을까...'


나중에 안 일로, 내게로 하소연이 막힌 그 학부모는
다른 부서의 어느 이에게 같은 이야기를 하며 비공개를 당부한 모양인데
미묘한 나와는 책무가 다른 터라 학교 상부에 즉시 보고가 올라간 것이다.
말하자면, 수사관에게 자신이 '지금 누구로부터 범죄 공모제의가 들어와
그를 수락하려는 중인데 혼자만 알고 계시라'며 당부하는 격인 거다. 


첫 수업이 끝날 무렵, 교장실에서 나온 아이가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다시 왔다.
사실대로 말씀드렸냐 물으니,
"아뇨... 그런 일 없다고... 아빠가 제 말을 오해한 거라고 말씀드렸어요.ㅠㅠ."


아빠가 그렇게까지 일을 크게 만들어 놓을줄은 몰랐다며,
항상 그런 식으로 앞질러 가는 아빠 때문에 못 살겠다며,
앞으로 죄송해서 그 선생님 수업을 어찌 듣느냐며, 꽤나 당혹스러워한다.


단초는 자기가 제공해놓고 모든 잘못을 아빠에게 떠넘기는 형상으로 내겐 보일 뿐이다.
"그럼 신중했어야지. 그런 아빠 성격을 알면서 왜 그런 오해 살만한 말씀을 드렸니."


성장 과정의 자연스런 속성 중 하나겠지만,
불과 몇 살만 되어도 아이들은 여러 방법과 이유로  manipulative 해진다.
그걸 고슴도치 부모들이 곧이곧대로 믿고
her/his side of the story 를 진실 전부라 여기는게 더 문제인 것이다.

 

 

 

 

 

 

 



그 일은 결국 학생의 오리발에 힘입어 학부모측의 오해 아닌 오해로 마무리됐지만,
그 교사가 실제로 그런 황당한 요구를 했던 건지,
그렇다면 그런 요구가 그냥 뜬금없이 그 아이에게만 생긴 배경은 무언지,
아니면 의미 전달과정의 innocent misunderstanding 이 빚어낸 헤프닝였던지,
혹은 학생 자신의 어떤 숨은 목적으로 교사의 명품가방이 등장한 건 아닌지,
그 진실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건,
교장실 사건 이후 아이러니하게도 그 학부모가 자신의 딸이 합류할 해외 필드츄립의 후원 명목으로
그 교사 손에 적잖은 돈을 끝내 쥐여주고 말았다는 사실과,
후원금을 받은 그 교사가 학교 행정부에 정식 보고를 했는지,
그리하여 실제로 그 돈이 필드츄립에 공공연히 사용됐는지 어쩐지는
나로선 알 수도, 알고도 싶지 않지만,


거금의 후원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이후 학년 말 내신 성적은 여전히 B 이상을 넘어서지 못했고,
결국 졸업을 한 달 앞둔 그 해 5월, 아이에 대한 교사의 그 고집스런 'B'학점은
세계적으로 공인된 어느 공식 테스트를 통한 수지의 빼도 박도 못할 시험결과를 통해

급기야 그 'accuracy'가 객관적으로 입증됨으로써,


자신의 언어 실력이 원어민 버금간다고 주장하는 딸의 말만 그대로 믿은 채.
"독일어 실력이 학년 최고인 내 딸에게 왜 A가 아닌 B만 계속 주는가?" 며
부당함을 토로하던 그 학부모의 accusation 은 

대번에 꼬리를 내렸다는 거다.

 


 

 

 

 

- 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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