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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얘기저얘기

향수 (Nostalgia) 란 마치





그녀의 거실에 들어선 우리 부부 눈에 한 남성이 낯설게 들어왔다.
 

Master Shifu 지팡이가 딱 일만큼
가슴까지 길게 내려온 흰 턱수염과 엉덩이 닿을 듯 치렁치렁한 백발.
타투로 도배된 팔다리에
헬로우하며 드러난, 치아 집단 실종된 잇몸.


산속에서 마주치기기라도 했다면 21세기 하이브리드 도승쯤으로,
다운타운 어느 뒷골목이었다면 'ex조폭 into홈레스' 쯤으로,
미스매취한 이들 캐릭터가 묘한 대조를 이루며 급궁금증을 자아낸다.


갸우뚱해 하는 우리 부부에게 그가 소개된다.
"이쪽은 내 childhood sweetheart, Dane 이야."


우리 부부의 너무도 친애하는 그녀가
자신의 보이프랜드라며 소개하는 남자의 첫인상은 그렇게 애매했다.







주 정부 기관에서 한 사회복지 프로젝트를 맡고 있는 지천명의 그녀는
일찌감치 손주 셋을 두게 된 돌싱 그랜마.
말이 그랜마지, 단정히 뒤로 올린 긴 생머리 포니테일과
화장기 전혀 없는 빼어난 하얀 얼굴에 파란 진, 흰 티셔츠 차림은 
지천명 나이가 무색할 만큼 참 싱그럽고 청순하다.


땡스기빙이라든가 생일 때면 변함없이 초대되어
그녀와 함께 크크킬킬 음식 준비를 돕는 그녀의 ex남편은 또 어떤가.
'이혼 커플 맞아?' 하며 우리에게 놀림을 당하기도 했었다.


그런 전남편의 방문이 드문드문해지기 시작하고
짜잔 그녀의 새 남친이 소개되는데,
어느 주말 늦은 저녁, 우리 부부에게 그녀의 근심 어린 전화가 띠리리.
남친 때문이다.
 
알고 보니, 마치 그녀를 이미 소유한 양 수시로 보자며
시간 배려 없이 조급증을 보이는 그의 일방적 행동은
아직은 좀 더 알아가는 단계이고자 했던 그녀에게 큰 물음표를 던져
결국 관계 청산을 했다는데
미련 못 버린 그가 막무가내로 매달리고 있는 거다.


그날 저녁 그녀에게 달려간 우리 부부는
문 밖에서 그녀를 향한 격렬한 '비련의 세러네이드'를 부르고 있는 그를 달래느라
늦은 밤까지 진땀을 빼야 했다.
남자의 포기는 이후 시간이 좀 걸렸다.







"우리 서로 무지 좋아했었는데... 그치?"
그를 바라보는 그녀 눈빛에 따뜻함과 믿음이 그윽하다.


초대객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해
그녀의 추억 보따리로 풍성해진 그 날의 디너는 그렇게 끝나고,
얼마던가 후, 우리부부를 따라나선 크래빙에서
그녀가 조심스럽게 그의 이야기를 꺼낸다.


"요즘 드물게 참 마음 고운 사람이야. 어려서도 그랬거든..."
 

그들은 학창 시절 서로의 첫사랑였단다.
당시 꽤나 부유했던 남자의 집은 어찌어찌 파산을 하게 되고
부모 불화를 참지 못한 사춘기 그 소년은 집을 떠나며 그녀와 긋바이 한다.


거기까지가 인연이구나 싶었다는데,
이후 그의 소식을 다시 접하게 된 건 SNS 어딘가에서였다.
수십년 세월이 흘렀어도 그녀는 첫사랑 그를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고.


가출 후 남자는 온갖 풍파를 겪으며
파경과 drug, 결국 홈레스 지경까지 이르게 되는데
그녀가 그를 발견한 것은 그가 바닥을 치고 막 다시 일어서기 시작한 즈음였던가 보다.


지고지순 청순했던 puppy love 기억은 시간의 단절과 함께
그렇게 수십 년 당사자들 가슴속에서 이집션 미라로 잠자고 있다
어느 순간 운명처럼 다시 이어진 닷닷닷 점들로 인해
차 배터리 점프 케이블처럼 파팟 스파크를 일으키며
소생의 호흡이 순식간에 불어 넣어지는 것일까,


첫사랑 연인의 불행한 세월이 안타까워서,
아직도 변함없는 사춘기적 순수함과 그 고운 심성에 놀라워하며,
그의 놓쳐버린 행복을 보상이라도 해주려는 듯
아무 조건 없이, 아무 의심도 없이 

그녀는 그의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





 


그다음 달 쯤이던가,
남편과 외출했다 귀가하던 중 교차로 신호를 받고 정차하고 있는데
바로 앞 횡단보도를 백발과 흰 턱수염을 같은 길이로 휘날리며 씩씩하게 가로지르는 한 사람,
신호를 받고 정차해 있는 모든 운전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모아진다.


그녀의 그였다.
이 영하에 맨발이라니.


그의 맨발과 휘날리는 백발, 활짝 편 어깨, 꼿꼿이 세운 턱, 성큼성큼 큰 보폭은
드러난 목덜미와 팔등의 비비드 타투와 묘하게 어우러져
차라리 깊은 내공의 aura마저 느껴지게 했다.


어찌 저리 당당하고 의연할 수 있을까.
그 남자가 '그녀의 그'란 걸 알고 난 후에 생긴
막연한 유대감 때문은 분명 아닌 거였다.
뭔가 달랐다, 속물적 잣대를 그냥 대 버리기엔.






그런 그의 언뜻언뜻한 '남다름'을 감지하면서도,
그리하여 비 정제된 외형만으로 그 내면의 깊이마져 반토막 내려던 성급한 나 자신을 비난하면서도,
아, 여전히 떨쳐낼 수 없는 이 한치의 '미심쩍음,'
그때와 지금 - 그 수십 년 간극에 도사려 있을 불확실성.


"위층 서재에 혼자 있어."
모임 때마다 줄곧 보이지 않는 그의 부재에
'오랜 간 혼자가 익숙해서' 그렇다며 사람과의 어울림을 불편하는 하는 그를 방어하는 그녀.
치아가 없는 그가 씹지 않고도 쉽게 삼킬 수 있을 영양가 풍부한 레서피에 고심하는 그녀.



"Nostalgia, it's like a drug, it keeps you from seeing things the way they are."
"향수란 마치 취하는 마약과 같아서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없게 만든다"
는 어느 영화 속 대사가 떠오른다.


방탄조끼 두께로 수십 년 무게를 견딘 그 굳센 '콩 꺼풀'에 감동하면서,
첫사랑에 얽힌 징크스를 싸늘한 현실론에 접목시켜
제3자의 아슬아슬한 시선을 보내는 난 지금 무슨 말을 하고픈 걸까.


"무언가에의 향수는 그것이 다시 돌아올 확률이 없음을 전적으로 확신하기 전에는 결코 안전하지 않다"
던 Bill Vaughan의 말을 잠시 음미해보며,
그 둘의 재회가 서로에게 있어
인생 제 2 챕터를 꽉 채워줄 '안전한 진품'이길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그리고
'추억'보다 훨씬 파워풀한 '나스텔지아' 란 타임머쉰을 탄 그들,
못 견디게 그립던 그 시절 퍼피러브 속으로의 시간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그들의 귀환길이 여전히 든든하고 멋지길.






- 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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