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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얘기저얘기

Happy Wife, Happy Life







늦은 저녁, 주방에서 그린스무디를 만드느라 분주했던 손을 잠시 놓고 거실로 향했다.
자신의 작업실에서 일에 열중해 있어야 할 남편이 웬일로 거실에 나와 있는데
의자에 몸을 반쯤 걸치고 앉은 채 고개 숙인 모습이
영 심상치 않다.


왜 그래? 어디 아퍼?


가슴 통증 때문이라며
새삼스러울 것 없다는 듯 진통제 한 알을 입에 톡 털어 넣는다.


보니 얼굴이 창백하다.
이마에 땀마저 송골송골 맺혀 있다.
몇 년 전 받았던 정기검사에서 별문제 없단 결과를 받았었기에
이후 가끔씩 호소하는 자신의 가슴 통증에 대한 내 걱정을 기우로 치부해 온 남편이다.


그런데 이번엔 내 느낌이 달랐다.


"자갸 응급실 가자."


진통제도 먹었으니 침대에 좀 누워있다 보면 괜찮아 질 거라며
그러나 영 자신 없는 목소리로, 침실로 향한다.


줄레줄레 따라 들어갔다.
"암래도 아닌 거 같아. 당장 병원 가자, 응?"


No means No 인 그에게
더구나 그 싫어하는 병원을 가보자는 내 이런 반복 조름이
결국 부부싸움으로 이어질 확률을 모르지 않지만
지금 그걸 두려워할 계제가 아니었다.
 

침대 앞에 까칠한 조교 포오즈로 딱 버티고 선 내게
누운 지 일 분도 채 되지 않은 그가 '조금 나아진 거 같아' 한다.
말 속에 묻어있는 '그저 희망 사항'.


"I don’t think so. 후회할 일 생기기 전에 제발 병원 가자."

그는 여전히 고집을 부렸다.
화인지 안타까움인지 두려움인지,
잘 모를 웅축된 감정들이 내 잦아든 목소리에서 스며 나왔다.
덩치 작은 아들내미라면 과감히 팔목이라도 움켜쥐련만...



화나고 절망적인 기분으로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그래, 병원 가자."
하며 남편이 몸을 일으킨다. 뜻밖였다.


"그래 잘 생각했어, 고마워."
정말 고마웠다. 
 

입던 옷 그대로 바로 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서둘러 주차를 마치고 응급실 입구를 향해 막 걷기 시작하는데
천천히 가자며 갑자기 걸음을 멈춘 남편이 가슴을 움켜쥔다.
병동 안으로 내가 뛰어들어가고...
곧 의료진들이 뛰쳐나왔다.







남편 실려 들어간 응급실 앞 대기실에 앉아
애타는 마음으로 기척을 기다린다.
말할 수 없는 공포가 밀려온다.


What if, what if…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이제부터 홀로서기를 연습해야 하나.
모든 재정 출.납은 물론, 차량 관리서부터 닥터 방문까지
내 모든 일상사까지 도맡아 케어해 준, 내 매니저요 삶의 전부 남편이다.
그 없인 난 그야말로 그냥 바보다.


너 없인 난 miserable이라며
단 하루라도 절대 나보다 먼저 가면 안 된다며
서로가 앞서거니를 외치곤 했던 우리 부부.


이럴 때 시어머니라도 곁에 계셨으면 의지가 되련만
그녀는 현재 해외 투어 넉 달째시다.
뜻맞는 친구들과 오래전부터 벼르고 별러 실행한 장기 유럽여행인데,
원래 이번 여름이면 귀환하기로 된 여행일정을
몇 개월 더 즐기시겠다며 가을쯤으로 연장하신 상태다.
그러니 여행중이신 분께 무턱대고 연락부터 할 수도 없는 일이다.

 

***


드디어 보호자 면회 허락이 떨어졌다.
응급실을 들어서자 바로 맞은편 열린 커튼 사이로 이미 나를 먼저 발견한 남편이
사이사이 살 드러난 푸른색 환자복 차림을 하고선
멋쩍게 미소 띈 얼굴로 내게 손을 흔든다.


온몸 여기저기에 주삿바늘이 꽂혀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가 난 괜찮아... 하며 누운 채 양팔을 벌린다.


잠시 후 들어선 담당 의사가 날 보자
"오호, 바로 그 아내분!" 한다.


큰일을 면할 수 있던 것이
다 아내 고집 덕분이었단 소릴 남편이 했던 모양이다.


의사가 말을 잇는다.
젊은 나이에 웬 심장질환이냐 싶지만
Family history 라는 게 그리 무서운 거라며
할 수 있는 방법은 그저 최선을 다해 playing with numbers라는 거란다.
완전 없앨 순 없기에 관련 수치를 가능하면 안전한 수준으로 유지하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는 얘기다.


남편은 다음날 심장 전문 병원으로 이송돼 스탠트 삽입 시술을 받았고,
상태 안정 모니터링차 일주일을 더 머문 후 퇴원했다.
한발만 늦었어도 open heart surgery (심장절개수술) 를 해야 했을 거란 말에
새삼 가슴 쓸어내린다.


 
****


그가 퇴원한 후
아내인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레서피를 찾아보는 일이었다.


Heart-Healthy recipes
Quick low calorie recipe
Easy recipes for people who hate cooking
One-pot recipes for anyone who can’t cook

 


요리 젬병이란 핑계로,
The last thing I wanna do is 요리! -- 를 외치기엔
이제 더이상 남편의 건강이 강 건너 불이 아닌 것이다. 


어느 블친님 말씀처럼
새 레서피를 한 달에 한.두개만 개발해 낸다 해도 일 년이면 열 개가 넘는 거다.
아무리 요리 젬병이라 해도 최소 한 달에 한 개쯤 마음 못 먹을 일도 아니다.
그간의 열 손가락 채 못 꼽는 내 초미니멀리즘적 레퍼투와를 비교한다면
그야말로 메뉴 대박 아닌가.









자신의 입원을 절대 엄마에게 알리지 말라고 남편이 당부한다.
여행 중에도 간간이 문자와 화상통화로 안부를 전하시는 모친에게
암일 없다는 듯 방긋방긋 웃음을 보이는 그 모습에 속 깊음이 느껴진다.
역시 남편은 자신의 아내바보 아버지를 쏙 닮았나 보다.
 

남편에게 물었다,
"그때 왜 갑자기 병원 따라나섰던 거야?"


"안 그랬음, 밤새 나 때문에 전전긍긍 불안해 할 거잖아.
Happy Wife, Happy Life가 내 모토란 거 몰라? 크크."






- 엘리 –


지난 여름 써 두었던 글을 이제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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