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산책
"우리 밤 산책하러 다운타운 갈까?"
끄덕끄덕 졸며 보고 있던 티비 다큐멘터리를 끝으로 곧 잘 준비를 하려던 중
남편이 건네 온 뜬금없는 제안이다.
시계를 보니 밤 열 시가 넘은 지도 10분이나 지났다.
'에긋, 이 시간에? 것도 동네 한 바퀴도 아닌 다운타운씩이나?'
하는 말이 튀어나오려던 걸 꾹 참고,
"그래? 오케이!"
바쁜 일을 핑계로 운동하곤 담을 쌓고 지낸 지 한참이던 그인지라
이렇게 산책이라도 가자는 그의 절대 흔치 않은 의외의 제안을 늦은 시간이란 이유로
거절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사실 그저께 밤에도 늦은 밤 산책을 다녀오긴 했다.
밤 아홉 시가 넘은 시간에 갑자기 밤 공기를 쐬고 오자고 하기에
흐르는 콧물 때문에 요 며칠 복용하고 있는 엘러지 필을 조금 전 한 알 털어 넣었던 터라
카우치에서 끄덕끄덕 오는 졸음을 대롱대롱 달고 있었으면서도
'날이면 날마다 오는' 제안이 아니지 않은가 싶어
기회를 놓칠세라 감기는 눈을 부릅뜨고 그를 따라 동네 한 바퀴 돌며 달밤체조를 하고 온 것이다.
잠옷차림만 겨우 면한 막무가내 복장으로 두 사람이 나섰다.
이왕 운동 삼아 나선 밤 산책이니 차를 가지고 갈 이유가 없어 스카이 츄레인역으로 향한다.
살갗에 닿는 밤 공기가 너무 차지도 너무 덥지도 않은, 완벽한 밴쿠버 여름밤이다.
다운타운엔 의외로 많은 사람이 나와 있었다.
유난히 인파가 몰린 곳이 있어 가보니 역시나 필름을 찍는 현장.
배우들이 영 낯선 걸 봐선 아마도 드라마인 모양이다.
조금 걷다 보니 친구 부부가 운영하는 핏자집이 나온다.
매번 그렇듯 들르지 않을 수 없다.
조각씩 파는 슬라이스 핏자점이라 가격이나 그 케쥬얼한 분위기 하며
특히 학생들에게 인기 만점이다.
갈 때마다 절대 돈을 받으려 하지 않는 쥔장인 걸 알기에
"우리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핏자값을 꼭 주고 오자!" 며 단단한 결심을 하고 들어서지만,
역시나 죽어도 받지 않겠다는 그 황소고집에 이번에도 우리의 완패.
한 푼이라도 팔아주고픈 우리 마음, 그냥 받아주면 안 되냐는 궁시렁을 입에 달고
핏자 한쪽씩과 소다를 각각 들고 테이블 하나를 차지해 않으려니
동석한 쥔장에게서 한숨이 흘러나온다.
"자식넘이 지금 다섯 살이 다 되도록 함께 시간을 제대로 보내 본적이 거의 없어."
개인 시간은 커녕, 가족을 위한 시간을 낸지가 언제지 기억도 안 난다며
언제까지 이렇게 일에 매달려 살아야 할지 요즘 고민이라며 고뇌하는 표정이다.
그럼 세컨잡을 포기하지그래? 라며 남편이 한마디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전공이 컴퓨터 프로그램이기도 한 그는
파트타임으로 카시노에서 프로그램을 관리해주는 일도 하고 있다.
지닌 포부가 큰 만큼이나 일 욕심도 많은 사람이다.
다소의 희생과 양보 없이 어찌 양손에 떡을 다 쥘 수 있을까.
간절히 얻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하는 것도 있을 수밖에 없음을...
돌아오는 스카이 츄레인 안에서 남편이 그런다,
"나 요즘 변한 거 같지 않아? 갑자기 의욕이 마구 넘치는 거 있지."
정말 그렇긴 하다.
얼마 전 작심삼일보다 아주 쪼매 더 버티다 그만둔 츄레일러 하이킹 이후,
동네산책 이라도 가자 하면 이 핑계 저 핑계로 빠져나가곤 하던 사람이 아닌가.
이렇게 이틀 연속, 그것도 늦은 밤에 무언가 신체 활동적인 것을 제안한다는 것은
비록 작심삼일로 역시 끝난다 할지라도 그에게 있어 아주 대단한 변화라고 할 것이다.
이럴 땐 입술에 침을 잔뜩 바르고라도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응, 맞아 맞아. 자기 때문에 요즘 나까지 기운이 마구 난다니까!"
"고마워 내 제안에 거절하지 않고 동행해 줘서."
"무슨말야, 나도 고맙지 뭐. 말만 해, 난 언제든 오케이야."
밤 열 시가 아니라 새벽 한시라도 난 그의 밤 산책 제안을
멸종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서라도 자다가도 벌떡 열심히 받들 것이다.
"글구 또 고마워."
"뭐가?"
"사진기 들고 나오지 않아 줘서."
하하.
큰 디카를 들고 셔터 누르느라 수시로 걷다가 서곤 하는 아내의 발걸음 속도를 맞추는데 그간
그가 직.간접으로 받던 스트레스를 내가 모르지 않음이라
이번만큼은 그를 그 스트레스에서 해방해주고 싶었던 거다.
(그래도 주머니 속 휴대폰으로 살짝 몇 컷 찍은 건 몰랐겠지.^)
"난 또 뭐라구. 우리 앞으로 이런 밤 산책 종종 하자 응?^"
밤 졸음과 맞바꾼 작은 행복이다.
밴쿠버 '차이나 타운' 야시장
- 엘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