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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랑동화랑

왕자와 거위신부

 

 

 

 

 

 

거위들이 떼를 지어 날때면 그 중 제일 시끄럽고 목소리 큰 넘들이
한 둘은 꼭 있다고 하는데 왜 일까요?  
그것은 철새인 거위들이  대이동을 하는 긴 여정에서 지치고 낙오되지 않도록
큰 격려과 자극이 필요한데, 그 중요한 역할을 그들이 맡고 있다는 겁니다.
북미 원주민 토템폴 중 '거위'문양이 바로 그 encouragement(격려.자극)를 상징하지요.


어느 조직이나 단체에서건 그 중심 부분에는 보스나 리더가 존재하고 
그들이 목청 큰 거위 역할을 더불어 겸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참모라던가 그 밖의 서열 낮은 그룹 중의 누군가들이 그 사이드 키커의 중책을 떠맡아
보이지 않는 큰 일조를 하는 경우가 더 많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우리 인간사회와 참 비슷한 부분이 많은 그들 동물사회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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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연재하고 있는 인디언 관련 설화에는 소위 '무당(shaman샤먼)'이라는 주술적 클립이 자주 삽입되고 있습니다.
이는 자연과 초자연세계를 넘나들며 이들과 인간세계를 교감시켜주는 매개물이 바로
이들 주술사라고 원주민들이 믿기 때문입니다.


샤먼은 남자일 수도 있고 여자일 수도 있습니다.
남성샤먼은 주로 영혼을 불러오고 미래를 보는 역할을 하며,
여성샤먼은 질병을 고친다거나 출생을 돕는 일을 전담합니다.
샤먼의 자격요건은 노예 출신만 아니면 다 가능할 정도로 그 폭이 넓기는 하지만,
실상 대개는 높은 계급의 - 말하자면 족장의 혈연 같은 - 로열훼밀리 출신이
그 역할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니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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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엘리의 한글 버전으로 엮어질 북미 인디언 설화 "왕자와 거위 신부"는
거위 토템폴의 상징인 '격려와 자극' 외에도 몇몇 숨은 주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설화를 대하는 독자의 느낌이나 자세에 따라 그 주제가 다양해질 수 있겠지요.

 

 

인디언 전설 "왕자와 거위 신부"

 

산도 더 깊고 강도 더 맑고 들판이 더욱 푸르렀던 아주아주 오래전,
narnauk인 생쥐 할머니가 하이다 섬에 살던 그때는 
캐나다 노스웨스트의 모든 것이 지금과 많이 달랐다지.
(* narnauk :  인간과 동물로 자유 탈바꿈하는 설화 속 초자연적 존재 )


먹이 푸짐한 여름 동네를 찾아 먼 여행길에 오른 거위떼들이
서로에게 보내는 끼룩끼룩 꺼이꺼이 암호 선율로 북녘 길목을 V자로 시끌벅적 수놓는

봄빛 파릇파릇한 어느 이른 아침.
이 거대한 여행객들을 부러운 마음으로 간절히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마을 족장의 아들.


'제아무리 빠르고 거대한 배라도 저 새들처럼 멀리 가지는 못하리...'


인간의 힘 없음을 한편 한탄하며 새 무리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바로 그때 어디선가 소곤거림이 들려왔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가 틀림없었다.


호기심을 한껏 담아 살금살금 발을 옮겨 도착한 그곳에는 젊고 아리따운 두 아가씨가 
물장구 헤엄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가지런히 놓인 커다란 거위 가죽 한 쌍.
'거위 여성들? 그럼 narnauk이 아닌가!'


인간과 동물 사이를 오가며 그 둔갑술로 인간세계를 혼돈 시키는 narnauk,
이 초자연적 존재들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과 거부감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몰랐다.

 


 
놀란 것도 잠시, 너무나도 곱고 아름다운 두 아가씨의 모습에 왕자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걸어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놀라서 저들이 도망을 갈 터인데 이를 어쩐다...'


날으는 요술카펫과도 같은 거위 날개옷이 없이는 그들도 도망갈 대책이 없을 거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왕자는 재빨리 그들의 거위가죽을 손에 움켜쥐었고, 
그 순간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두 아가씨, 
왕자의 손에 들린 자신들의 거위 날개옷에 시선이 멈추자 소스라치게 놀란다.


"저와 결혼을 해 주시오. 그러면 이 날개옷을 돌려 드리리다."
 왕자 자신도 모르게 주문처럼 나온 말이었다.

왕자의 손에 들린 자신의 날개옷을 냅다 낚아챈 한 아가씨,
"헉, 뭐라고! 고작 인간인 주제에 하늘나라 우리 거위 공주님과 결혼을 하겠다니 어림없는 소리!"


"저... 다... 당신과 결혼하겠어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먼 구름 속으로 훨훨 거위 하녀는 사라지고,
홀린 듯 인간세계 이 남성을 따라온 거위 공주. 그러나 왕자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자신의 신붓감이 narnauk 이란 걸 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그 따가운 눈총과 따돌림을 어찌 해야 할지...


"당신이 narnauk이란 사실은 우리 둘만의 영원한 비밀이어야 할 것이오..."
거위 공주는 왕자에게서 되돌려받은 자신의 거위 날개옷을 삼나무 고목 속에 깊이 숨겨두었다.


입을 꼭 다문 며느리의 가족사가 궁금한 족장 가족이었지만
고급스러운 장신구 하며 품위 있고 우아한 행동거지 하며,
어느 대단한 부족의 족장 딸쯤으로 내심 짐작하며 그저 흐뭇할 따름이었다.


왕자와 거위 공주는 행복했다.
그러나 거위 신부에게 한 가지 큰 고민이 있었으니 바로 음식.
인간의 음식은 정말 먹기가 어려웠다. 


어느 날부터인가 신부는 한밤중에 잠자리를 벗어나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서는 동트기 전에 돌아올 때가 많았고,
그렇게 돌아온 그녀는 몸이며 손발이 바닷물처럼 아주 차가 왔다.


어느 날 밤, 아내의 뒤를 몰래 밟기로 작정하고 따라나선 왕자.
그는 그녀가 삼나무 깊숙이 감춰둔 자신의 거위 날개옷을 꺼내입고 이곳저곳을 훨훨 날아
바다 식물들과 들판의 풀들을 뜯으며 즐겁게 노니는 모습을 목격한다. 
왕자는 몹시 슬펐다.
아내는 인간과의 삶이 행복하지 않은 것이었다.

 

 

여름이 가고 혹독한 추위의 겨울이 왔다.
얼음으로 뒤덮여 꽁꽁 언 강과 들판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태초 이후에 처음 맞는 너무나 혹독한 추위에

그저 대책 없이 굶주릴 밖에 없는 하이다 사람들.


그러던 어느 날.
"쉬잇, 잠깐만... 저멀리 소리가 들려요. 제 아버님께서 제게 신호를 보내오십니다..."
공주는 저 멀리 하늘을 향해 귀를 쫑긋세웠다.

먼 하늘로부터 거대한 무리의 새가 순식간에 몰려오고,
그들의 떠났을 때에는 엄청난 양의 식물뿌리와 목초들이 왕자의 집 마당에 수북이 쌓여있었다.


"우리 인간에게 저 이상한 음식이라니 하하하..."
"가만 봐봐, 저 여자 걸음걸이도 뒤뚱뒤뚱 마치 거위같쟎아."
"저러다 저 집 가족이 모두 거위로 변하면 어쩌지!"
시기심에 가득 찬 동네 사람들은 그렇게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나를 비웃고 있어요...'


추운 겨울이 가고 먹거리 풍부한 여름 마을을 찾아 새 떼들의 이동이 다시 시작된 어느 봄날. 
먼 하늘을 부러운 눈으로 하염없이 바라보던 공주는
참나무 깊이 감춰진 거위 날개옷을 입고는 하늘로 훨훨 날아가 버렸다.


"어머나, 거위 공주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지 뭐야..."


비탄과 낙담에 빠져버린 왕자는 샤먼을 찾아가 공주에게로 가는 길을 묻고, 
"집 뒤쪽에 공주에게로 가는 길이 있다"는 말을 듣는다.
 

한번 들어서면 도저히 빠져나오기 어려울 만큼 깊고 우거진 하이다 섬의 숲, 
마치 왕자를 위한 듯 한 발씩 열리는 길을 걷고 있자니 어디선가 찍찍 소리가 들려온다.
커다란 나뭇가지 밑에 깔려 신음을 하는 생쥐 한 마리.
가지를 살짝 들어 꺼내어 주는 순간, 생쥐 대신 그 자리에 노파가 서 있다. 
바로 생쥐 할머니.


"내 생명을 구해주었으니 나도 그에 맞는 보답을 해야겠지. 자아, 이것을 받게."
하며 생쥐가죽을 건네준다.


"그러나 내 말 명심하게. 자네와 거위 공주와는 잘 맞는 결혼이 아니야."

 


  

 


 

얼마를 걷자니 팔 하나에 다리도 하나, 머리는 반쪽밖에 없는 한 남자가 저만치서 높이뛰기 하며 온다.
'아... 전설 속 인물로만 믿어왔던 마스터하퍼!
게다가 저 높디높은 장대는 하늘의 땅, 하늘나라까지 닿는다지 않던가!'


왕자는 생쥐 할머니의 선물인 생쥐 옷에 생각이 미치자 그것을 재빨리 뒤집어썼다. 
그러자 순식간에 몸이 생쥐로 변하고
그는 곧바로 마스터하퍼의 빨간 장대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키 큰 나무보다 높이, 하늘의 독수리보다 높이, 구름보다 높이... 그렇게 한참을 오르고 또 오르다 보니
눈 앞에 하얀 구름커튼과 별들로 둘러 쌓인 파란 성이 나타났다.
거위 공주가 사는 하늘나라에 드디어 다다른 것이다.


"이곳에서 저와 함께 평생 살아요..."
그리움에 애태웠던 둘은 하늘나라에서 참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왕자는 인간세계의 모든 것이 조금씩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오래전 거위 공주가 그러했던 것처럼.


종종 땅 아래를 바라보며 눈물을 짓곤 하는 사위 모습을 본 장인,
"휴우... 내 사위가 이곳에서 정녕 행복하지 않으니 어찌하리..."
왕자가 잠든 사이 장인은 그를 거위구름에 태워 땅으로 내려보낸다.


'이상하다, 꿈이었던가...'
잠에서 깬 왕자는 주위를 둘러보지만, 지금까지의 모든 일이 마치 꿈인 듯 몽롱하다.
바로 옆에 높여진 생쥐가죽에 시선이 미치자 그걸 집으려 손을 대는 순간, 
사르르 사라지며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
"잘 맞는 결혼이 아니었다니깐."
 

'그래, 우린 맞는 인연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하늘에 거위들이 스쳐지날 때마다 눈물과 한숨이 절로 나오고 혹시나 하여 그때의 그 호숫가로 가 보지만 
물장구 치며 놀던 그때의 두 아가씨들은 더이상 볼 수가 없었다.

 

 

 

 
 
어찌보면 나무꾼과 선녀'의 북미인디언 버전과도 같은  이 스토리.
서두에  잠시 언급했던 '거위'가 상징하는 메시지 외에도
현대사회에 하나 더 던져줌직한 이 설화의 또 다른 주제는 과연  무엇일런지.
생쥐할머니가 반복해 언급하는 그 '맞지 않는 결혼'의 기준점이란.
본래 자신의 성분을 완전히 잊고 전혀 동떨어진 개체속에 녹아져 간다는 것,
그만큼의 희생, 자기 개선과 노력없이는 어쩜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한 순간 인연으로 한평생을 함께 엮어간다는 것.
'사랑이 밥 먹여주는 건 아니다'식 반 사랑지상주의를
너무 삭막한 현실론으로만 치부할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불펌 금지

엘리 "픽션 난픽션" / April 7,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