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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얘기저얘기

어느 가장의 고뇌

 

 

 

 

누나! 911 좀 불러주세요!


새벽 3시.
수화기를 타고 온 김 아저씨네 큰 아들내미 환이의 다급한 목소리다.


새벽부터 어머니와 언성을 높이던 아버지가 갑자기 목덜미 뒷부분을 감싸 쥐며 쓰러지셨는데
의식불명이신 것 같단다.
비몽사몽으로 911과 통화하며 그 집으로 차를 몰았다.

 

40대 부부와 초등.고등 아들 둘이 가족구성원인 김 아저씨네는
당시 밴쿠버 땅에 발을 디딘 지 1년 6개월 되어가는 투자이민 가족.


고국에서 소규모 사업체 몇 개를 거느린, 그래도 남들보다 먹고 살만했던 이 가족의 이민목적은
공기 맑은 곳에서 '스트레스 없는 평범한' 자녀교육.


정착시 밴쿠버에 딱히 아는 사람 하나 없던 이 가족에게 도움되었던 사람은 지인의 친구의 친구쯤 되는 사람.
집 사고 차 사고 등의 모든 일은 어찌 됐든 그 지인의 힘을 온전히 빌어 가까스로 해결되었는데...


살구꽃 만발한 마당에서의 바비큐와 더분 새 환경의 황홀함 속 몇 개월.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이민 올 때 꼭꼭 눌러 배에 부쳐온 온갖 한국음식재료들과
수중에 있던 현금 모두 바닥.


은행에 가 현금을 찾긴 해야겠는데...
그래머와 단어들이 따로국밥으로 머릿속에서 뱅뱅 돌 그놈의 영어만 생각하면
그만 자라목이 돼버린다. 차라리 굶고 말자....


서 말 구슬도 꿰어야 보배, 그림 속 떡.
은행 금고 안의 자기 돈을 침만 흘리며 어쩌지 못한 채 그렇게 밥에 고추장 비벼 먹으며
그래도 그게 즐거워 히히덕거렸던 김 아저씨네 가족였단다.


 

 

 

 

911과 통화를 끝마칠 즈음 어느새 그 집에 도착
한적한 주택가인 그 일대를 채우고 있는 백차와 쥬라식 공룡만 한 삐뽀삐뽀 벌건 불자동차는
이미 내 심장박동수를 올려놓는다.


꿀꺽... 침을 크게 한번 삼키고 집안에 성큼 들어서니
게슴츠레 반 뜬 눈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김 아저씨, 이를 둘러싼 가족 모습이 완전 초상집이다.
내 중간 통역을 통한 페러메딕의 신중한 질문과 간단한 조처가 끝나고 김아저씨 병원 후송.


중환자 대기실에서의 기다림이 5시간여쯤 지나자 의사호출이다.
그런데..참 이상도 하단다.
환자가 목덜미 뒤 심한 두통과 가슴 통증을 호소하기에 각각 사진촬영을 해봤는데 아무 이상 없다.


다리도 아무 감각이 없다기에, 검사용 디바이스로 허벅지와 무릎을 톡톡 두드리니 감각이 느껴진단다.
그런데...정강이를 톡톡 두드리니 감각이 전혀 없단다.
정강이를 내려가 발목 부분 이하로는 감각이 다시 있단다.


사진촬영에 나타난 신경손상은 아무것도 없는데 참 이상도 하다..
마술사의 조화도 아니고, 허벅지와 발목까지 이어진 다리신경이
통통 돌다리 건너듯 정강이만 폴짝 건너뛰어 발목에 척 착지를 했다는 야그인데? 거참.


의사가 아내를 부른다.
혹 가족 문제가 있다면 Social Worker와 상담을 좀 해보는 게 어떠냐고 조심스럽게 물어온다.
순간 와이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진다.
다 내 잘못이에요...

 

 


 

 

그녀의 반성스토리


고추장 밥만으로도 마냥 신기하고 즐거워하며
그렇게 투자이민의 2년 족쇄가 묶여있는 채로 1년 6개월이 지나고
이제 남은 6개월은 서서히 부부를 압박해 왔단다.


고국서 익숙했던 모든 직함 땅에 묻고, 좀 더 신중한 사업아이디어와 경험을 얻기 위해
자원봉사 공장사원을 마다함 없이 발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니고 있는 남편.


그런 남편의 동분서주를 모를 리가 없는 아내.
알면서도...낯선 언어 앞에 움츠러든 굼뜬 집안 가장의 모습이 너무나 작고 초라해 보인다.
투자사업에 근사하게 성공한 지인 누구누구네 집, 아들내미 친구 누구누구네 집...


911 그날 아침이 바로 그즈음이었던 거다.
며칠간 이어진 악몽으로 꼬박 새우다시피 한 밤이 지나 새벽이 오기 무섭게
아내는 결국 극도의 초조함을 드러내고 만다.


도대체 어떻게 할 작정이냐......고.
동서남북 뛰어다니며 힘들게 고생하는 거 알기에 그간 암말않고 있었지만
이러다가 꼼짝없이 deport (강제추방) 되는거 아니냐...고.
아내는 그간 참아왔던 불만들이 서러움과 함께 봇물되어 터져버린다.


기다렸다는 듯 남편의 목청 큰 반격도 시작되고,
이에 더 서러워진 아내, 호랑이 담배 피던시절까지 들춰내는 유치싸움으로 사태를 악화시킨다.


그런데 갑자기...
남편이 머리를 고통스럽게 감싸고 얼굴을 마구 이그러뜨리며
뒤로 퍼억.. 쓰러지는게 아닌가!


환아, 911 불러라! 빨리!

 

 



남편의 속사정


그간의 아내 불만. 결국 이런 식으로 터져 나올 줄 알고 있었다.
하기야 지금까지 침묵하며 참아준 게 고맙기까지 하다. 하지만.. 난들 어쩌랴... 나도 힘들다...
내 수십 개 물집으로 고통스러운 발바닥과 못 박힌 손바닥을 한 번만 더 생각해준다면
더 못 참아 줄 것도 없잖은가...
평생 바가지란 모르고 살아왔던 아내에게 새삼 그 버릇까지 생긴다면, 헉.
그럴 순 없지....


순간, 김 아저씨의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적 아이디어.
아.... 머리를 쥐어 싸고.... 버버..거리며.... 뒤로 퍽... 쓰러지는....거여따.

 

 

Epilogue

 

"환자 그냥 퇴원해도 됩니다"란 의사의 말.


아무 처치와 처방도 필요없는 김 아저씨는 결국
정강이의 무감각과 뒷머리의 통증을 '끝끝내 우기면서' 휠체어로 조심조심~집까지 모셔졌다.


"여보~ 이 제조약 먹구 며칠 푹 쉬시면 많이 좋아질 거래.
그리고... 내가 잘못했어. 담부턴 절대로 바가지 안 긁을께..."


의사가 눈을 찡긋하며 건네준 부인(그리고 나)만이 아는 익명의 특효약

'바이타민' 한 병을 남편 앞에 흔들며 방긋 웃음을 보이는 아내의 말이다.

 

 


김 아저씨 가족.
이후 몇 년이 흐른 지금, 밴쿠버에서 작은 레스토랑 운영하시며 모든게 happily ever after 라네요.


Good Luck~!

 

 

- 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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