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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얘기저얘기

궁여지책 레서피

 

 

 

 

 

남편의 낚시 취미가 열기를 더하면서,
그리고 마치 숨어있던 재능이 비로소 드러나듯
그의 손에 씨름선수 팔뚝보다 더 큰 연어들이 들려오기 시작하면서
우리 집 냉장고는 연어 지천이 되었으니.


Pink, Sockeye, Red Spring, White Spring, Chum, Chinook...


First-come, first-served.
냉동실 입성을 놓친 넘들은 대기표를 받고 아래층 냉장실에서 버틸 때까지 버티다
끝내 자폭테러로 끝을 맺기도 하는데,
마켓에서 돈 주고 산 것이었다면 절대싸지 않은 그 가격에 가슴을 박박 쥐어짰을 게 분명하지만,
결국 갔군, 할 뿐이다.


시어머니 냉동실도 이미 연어 만원사례,
먹어 먹어, 또 주께, 친구네 나눠주고, 이웃에도 돌리고,
우리 집 식탁 위엔 허구 헌 날 연어디쉬.


후라이펜에 튀기는 쌔먼 스테잌이 요리법 전부이다시피한 아내의 달랑 메뉴와
오븐구이, 레드/그린/옐로우 종류별 타이커리, 연어 햄버거, 연어 샌위치, 연어 파스타 등
제법 다양한 남편의 레서피를 총동원해 한 달 20여 일을
지지고 볶고 찌고 구우며 연어와 살다 보니
이제 연 소리만 들어도 헛구역질이 날 정도인 거다.


냉동도 아닌 그 팔팔한 연어들,
마켓에서 구입해 왔다면 돈도 돈이려니와 스프링 같은 넘들은 구하기도 쉽지 않을 테니
이를 생각하면 그저 배부른 투정이요,
복에 겨워 뭐에 뭣 하는, 죄송한 소리가 될 수도 있을진 모르겠다.

 

 

 

 

 

 

 

 

 



아, 이 넘치는 연어들이 다 money, money, money!였으면 얼마나 좋으랴.


우리 뭔가 다른 레서피를 개발해야지, 이거 질려서 안 되겠다.
나와 남편의 이구동성이다.


인터넷을 여기저기 뒤적이다, 앗 한국식 생선 조림이 눈에 띈다.
맞다, 어릴 적 친정 엄니가 해주셨던 그 달콤매콤 갈치조림이 얼마나 맛있었나.
그래, 꼭 꽁치나 갈치여야만 하겠어, 울집 연어로 함 시도해보자.


갈치조림 레서피가 인터넷 이곳저곳에 보인다.
그런데 이룬, 내게 있는 양념보다 없는 게 더 많다.
할 수 없지, 걍 대충 있는 양념을 사용한 엘리버전 연어조림으루다.


원래 레서피를 조금 수정해,
간장과 고추장 기본 양념에 케첩과 스프링롤 소스, 이탤리언 소스 매기, 와인 비니거 등을 섞었고,
캐럿과 버섯, 이탤리언 즈끼니, 버터넛 스쿼쉬,
그리고 마지막으로 베이즐 (basil) 과 깨소금을 송송 뿌렸더니....
와우, 맛이 제법이다.


간장 베이스 음식을 생소해 하는 남편인 걸 알기에 혼자 살그머니 진행 중였는데,
개 코 남편이 코를 벌름거리며 주방으로 온다.


Wat r u making?  (뭘 만드는 건데?)
U r not gonna like this.  (당신은 이거 안 좋아 할 거야.)


먹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느냐며 야심 차게 한 스푼 가득 국물을 뜬다.
'아휴.. 저 짠걸...'


예상대로다, 표정을 아무리 감춰도 딱 보인다.
"거봐, 내가 그랬잖아, 당신은 안 좋아할 거라고.^"
"아냐, 맛은 있는데... 좀 생소해서..."


아내가 만든 음식에 맛없다란 말은 하지 않는 사람이라
'좀 생소해서' 에 담긴 그 이상의 의미를 내가 왜 모를까나.


"괜찮아, 굳이 먹어주려 하지 않아도 돼, 다 내 꺼면 더 좋지롱~"
많은 서양인이 간장을 주소스로 한 한국 음식을 낯설어함이 사실이다.

 

 

 

 

 

 


저녁 식사를 근사하게 만들어 주겠다던 남편이
늦어지는 일 때문에 힘들겠다며 미안하단 텍스트를 보내온다.
"내 걱정은 하지 말구, 자기나 알아서 잘 챙겨 먹어~"
아직 반이나 더 남은 조림이 마치 넉넉한 통장 잔액인양 마음 든든한 거다.


혼자 저녁을 먹고 있을 무렵, 남편이 귀가했다.
옷 갈아입고 주방을 다녀온 남편 손에 연어조림이 들려있다.
당신도 먹으려고? 하는 의아한 아내 표정에,
"구미 당기는 냄새라곤 할 수 없지만, 먹다 보면 좋아지겠지?^"

평상시와 다르게 맛나게 먹겠노라 나서지 못함이 내심 많이 미안했던거다.
그러고 보면 남편의 배려는 아내인 나보다 항상 한 수 위이다.


냉동실에 남편의 새 연어가 들어설 빈 공간이 한둘씩 생길 즈음이면
매콤달콤 연어조림도 아마 내게 지긋지긋해져 있을 테지만,
당분간 새 맛을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되고,
비록 퓨전이지만 엄마 맛 갈치/꽁치조림 그리움도 해소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요리젬병의 큰 소득 아닌가.

 

***

사진 : 지난 9월 며칠 연휴때 다녀온 Port Alberni 에서 찍은 것들입니다.
Port Alberni 는 이곳 브리티쉬 컬럼비아주 밴쿠버 아일랜드에 있는 작은 도시로,
유명한 Stamp Falls 의 salmon run 이 있고, 연어  축제로 잘 알려진 곳이지요.

 

 

 

- 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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