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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얘기저얘기

촛불 T

 

 

 

 

해가 기웃기웃, 남편은 귀가 전이다.
아직은 낯선 새 공간, 욕실에 작은 티캔들라잇 하나는 어떨까.
캔들 홀더 하나를 뒤적뒤적 꺼내 들었다.


갓난아이 주먹만큼 쯤 되는 앙증맞은 그 초록 티 캔들 홀더는
얼마 전 남편의 단골 스포츠 마켓에서 그의 눈에 번쩍 띄어 집에 온 넘인데
구매 이후 처음 불붙여보는 참였다.


미니어처 랜턴처럼 생긴 것이 어딘가에 걸 수 있도록 가는 체인이 달려 있고,
가운데엔 얼핏 티 캔들이 딱 들어갈 만큼의 공간과
그 아래 위로는 금속패늘이 샌위치처럼 맞대어 있는 모양새다.

 

 

 


Tea Candle 을 한글로 뭐라 해야나 싶어 번역기에 넣으니
"촛불 T" 란 기가 막힌 명답을 내놓는다. 


그리하야 촛불 T양을 랜턴 중간 공간쯤에 착석시킨 후
발그스름 불 밝혀진 캔들 랜턴을 들고 매달 곳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창문 커튼에 매달까도 싶다가, 사방 천지 알록달록 타올나라라
저 가냘픈 체인에 캔들의 안전을 맡기기엔 왠지 미심쩍다.


궁리 끝에 카운터탑 한켠에 조심스레 올려놓고서야 만족한다.
촛불 은은한 욕실을 나와 홀웨이에 쌓인 남은 짐정리를 시작하는데...
한 십 분쯤 지났을까, 흠흠... 어디서 타는 냄새.


이웃 누군가의 야드 바비큐 디너를 연상하며 하던 일을 계속하다
혹시...하는 마음에 욕실로 달려가 보니 랜턴에서 불길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순식간에 폭발이라도 할 듯한 기세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솟구치는 불길 바로 위에 닿을 듯 매달려 있는 손타올들,
그 끝의 검은 그을음에 시선이 가는 순간,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맨손으로 불에 휩싸인 캔들을 덥석 움켜쥐었다.
지금 뜨거운 게 문제가 아닌 거다,
집어 들긴 들었는데 이 불덩어리를 어찌해야 할 지 앞이 하얗다.
여길 봐도 타올, 저길 봐도 타올이다.
제길 헐헐헐 타올들.


아, 내가 드뎌 사고를 치고 마는가 보다...

 

 

 

 

 

 


두려움과 뜨거움으로 덜덜 떠는 손의 진동을 참아내지 못한 양초가
중심을 잃고 하마터면 카펫 깔린 욕실 바닥으로 추락할 뻔 한다.
있지도 않던 운동신경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겨우 중심을 잡고서야 옆에 놓인 세면대 보울이 눈에 들어 온다.


세면대 속에 던져진 랜턴에선 더 큰 불꽃이 튄다.
아무리 작은 몸집이라지만 체감지수 백 배쯤의 불길은 정말 무서웠다.
 

소방대원의 물대포를 떠올리며 수도꼭지를 열었다.
쏴아...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물길 속에서 한순간 솟구치던 불길이
마침내 사그라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피시식 꺼진다.


휴우....
지옥 문턱까지 다녀온 기분이 바로 이런 걸까.
아직도 떨리는 두 손과 방망이 치는 가슴을 쓸어내리려니
그제야 손바닥과 마디가 화끈거린다.
몇 군데 데인 자국과 하얀 물집.


거즈를 붙인 후, 살인범 범죄현장 다시 들러보듯 조심스럽게 욕실로 향한다.
온통 T양의 하얀 눈물로 뒤덮인 세면대,
왝스는 물 내려가는 드레인 입구를 거의 막다시피 하며
화산 용암처럼 파잎 안까지 흘러내린 형상이다.
양푼 비빔밥에 고개 묻듯 왝스를 스푼과 나이프로 한 삼십 분쯤 벅벅 긁어내고 나서야 휴우...한다.
 

 

 

 

 

 

 



아, 왜 남편은 아직 안 오는 거야,
내 엄청난 욕실 대화재 진압 활약상을 빨리 알려야 하는데.
 

그런데 암만 생각해도 이상타.
캔들 랜턴 외관은 분명 금속재질이었으니 외부가 원흉일 리는 없고,
불길이 촛불T 부근에서 치솟은 걸 보면
아마도 내가 T양을 엉뚱한데 배치했거나
사용 전 제품 안에 제거해야 할 무언가가 있었음을 간과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마터면 내 새 터전을 잿더미로 날릴 뻔한 무서운 녀석,
앞 뒤 생각할 것도 없이 왝스로 뒤덮인 그을린 랜턴을 쓰레기 통에 던져 버렸다.


가슴 벌렁거림이 가라앉을 무렵, 남편이 귀가했다.
옷 갈아입는 그를 부여잡고 오늘의 빅-늬우스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그랬어? 이쿠! 저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박자를 맞추는 남편 얼굴에는 웃음기가 숨겨져 있었다.
진짜루 클날 뻔했다니까는!
거즈 붙은 손을 보고서야 웃음기를 거두는 남편.


알고 보니 그 마이크로 캔들 랜턴은 이름 그대로 야외 휴대용이라는데,
내가 무엇을 어찌 잘못 조작해 그런 상황을 만들었는진 아직도 의문이지만,
아니 어쩜 순전히 한 몫 단단 소송감인 불량품이었다 해도
원인을 규명코자 내 수명 십 년쯤을 단축시키고도 남았을 그 촛불T와 타버린 랜턴을 찾아
쓰레기통을 뒤적거릴 마음은 추호도 없다.

 

 

 

 

 

 

 

 

 


초등생쯤 때였던가,
어느 날인가 방과 후 집에 와 보니 어무이가 병원에 입원하셨단다.
병원 침대에 누워계신 어무이 팔과 다리에는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당시 당신이 파트타임으로 일하시던 직장에서
누군가의 실수로 어찌어찌해 불이 붙기 시작했다는데,
사방이 발화성 높은 물건 천지라 순식간에 불 옮겨붙기는 시간 문제,
모두 발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모르던 상황에
어무이가 Jeanne d'Arc 처럼 뛰어들어 불길 위를 구르다시피
급기야 진화를 하셨다는 거다.


그 행동이 주는 무게와 깊이를 당시엔 깨닫지 못했던 나,
한참 세월이 지나
"엄마, 무슨 생각으로 그런 무모한 행동을 하셨어?"
"생각할 겨를이 어딨니, 자칫 온 가게가 다 불붙게 생겼는데."


그 가게 오너 가족은 우리가 한국을 떠나올 때까지, 그리고 그 후에도 오래간
울 어무이를 가족의 은인 이상으로 대했던 기억이 난다.


난 어찌했을까,
촛불 T양과 랜턴 군의 반란 장소가 내 집 욕실 아닌 누군가의 집이었더라면 말이다.

 

***

 

 

 

 

 

 

 

 

 

 

 

 

- 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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