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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얘기저얘기

시 모녀는 냉전 중

 

 

 

 

"한 시간 후에 엄마 픽업하러 버스터미널에 가야 해"
휴대폰 통화를 마친 남편의 말이다.
"어제 가셨잖아, 한 달 예정하신 거 아녔어?"


주말에 놀러 왔다 집인 시애틀로 돌아가는 큰 시누이 부부를 따라
이번엔 넉넉히 한 달 정도 머물 예정으로 가신 시어머니 리다가
하룻밤 지나기 무섭게 지금 밴쿠버행 고속버스 안에 몸을 싣고 계신단다.


"누가 아니래.  모녀가 거서 그새 또 티격태격 했다네, 헐."


뭐, 모녀지간이란 게 대개가 별거 아닌 일로 이러쿵저러쿵 하다 틀어지고, 또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화해하곤 하는 관계이니 새삼 놀란 토끼 눈으로 걱정스러움을 표할 것도 없지만,
암튼 지난 크리스마스 시즌을 즈음해  완전 성공작였던 시애틀에서의 두 달간 모녀 장기 합숙 이래로
평화모드가 꽤 오래간다 하던 중이었다.


"아니, 왜 또?  이번엔 뭣 때문에 다투셨대들?"
"에그, 나도 아직 몰라.  들어봐야지 사연을."
심각한 당사자와 관계없이 이거 우리끼리 이렇게 킥킥거려도 괜찮으려나 몰라, 싶으면서도
아이처럼 토라지셨을 리다의 귀여운 얼굴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오고 만다.

 

예정보다 일찍 도착해 벌써 와 기다리시는 리다를 차에 태우고 오는 길에
이 며느리가 보고파서 이리 하루 만에 서둘러 돌아오신 거냐며 내가 농담을 건네니
그래 맞다 맞장구를 쳐주시며 시애틀에서의 사연을 씩씩 풀어 놓으신다.


글쎄 앤디한테 입 뻥긋을 못하게 한다니까!
단어 하나, 몸짓 하나 골라서 해야 하고,뭘 하나 쥐여주려면 애 엄마 허락부터 받아야 하니,
참 내. 아니, 난 뭐 저희 남매들을 안 키워봤나?


 

 

앤디는 큰 시누이의 2살배기 아들이다.
쉽지 않게 가진 아이이다 보니 유난히 애지중지한 마음이기도 하고,
전공상 건강과 유아교육에의 관심과 지식이 유별한 시누이 인지라
앤디를 갖기 전부터 시작해서, 임신 때 태아교육, 출산 후 두 살이 넘어가는 지금까지
그녀가 기울이는 정성과 심혈은 거의 혀를 두르게 할 정도랄까.
 

사실 임신 전까진 헬스클럽과 health food 스토어를 운영하며 에어로빅 강사도 맡아 했었고,
또 부부가  triathlon(철인3종경기) 스포츠 커플이라
미국인 남편은 어메리칸 'iron man' 으로, 캐네디언인 시누이는 캐네디언 'iron woman' 으로
각각 우승컵을 거머쥔 그야말로 iron couple이니 건강에 관해선 일가견이 있는 시누이 부부이긴 하다.


그녀의 건강 완벽주의자적 면모가 어느 정도냐 하면,
임신도 한참 전,  best gene 최고로 건강한 유전자가 수정되어야 한다며
약하거나 질병 우려가 있는 유전자 미리 골라내기 시술을 정기적으로 받았던 것만 봐도 그렇고
(이런 검사와 시술도 있다는 걸 난 처음 알았다.)


분만 시 아이에게 브레인 데미지를 가장 적게 준다는 water birth(수중 분만) 를 하련다고
출산 몇 주 전부터 미드와이프를 동원해 목욕실을 수중분만실로 완전 개조하다시피 했는데,
안타깝게도 태아가 위로 올라앉아 영 세상 데뷔를 할 생각을 않는 통에
목욕통에서 온갖 진 다 빼며 버티다 결국 산모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러서야
병원으로 긴급후송돼 제왕절개를 하는 해프닝을 치르기도 했다.


뿐인가, 오르게닉(무공해)이 아니면 먹지도 입지도 않는 골수 오르게닉주의자인 그녀는
아이가 태어나서는 색상을 내는 염료가 갓난아이 피부에 해롭다며
기저귀도 일회용이 아닌 완전 오르게닉 천으로 특별주문해 직접 세탁기를 돌려 빨아대고,
아이 옷 역시 색도 무늬도 없는 오르게닉이라
그야말로 쌀포대 마냥 노르튀튀한 것이, 어찌 보면 홈리스 분위기마저 풍겨나오는 것들였잖나.


또 이유음식도 절대 시중 제품을 사는 법이 없어
이 재료는 아이 성격 형성에 좋고, 저 재료는 잠투정 유발 성분이 있어 나쁘고 등등
직접 심사숙고한 오르게닉 재료만으로 만들어 먹이는데,
언젠가 한번은, 아이를 위해 특별 주문구매한 백 수십 불짜리 영양 시럽을 내가 실수로 다 쏟는 바람에,
말로만 괜찮다며 울상짓는 시누이 얼굴을 보며 미안해 죽을 뻔 한 적도 있다. 아흐.


근래엔 또 새로운 경험을 해주겠다며 실제 헬리캅터 비행연습 패키지를 사서 두 살 배기 아이에게
직접 조종대를 잡아보게도 했는데 (물론 조종사와 함께),
이후로 비행기만 보면 사족을 못 쓰는 아이에게
제 몸집 두 배쯤 큰 군사용 비행기 시뮬레이터를 선물해 주고는
그 둘레에 일제히 달린 폭격무기에 대한 기능을 설명할 때는
무기 같은 폭력적 의미가 담긴 단어나 표현은 아이에게 금지인 까닭에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총알이 아닌 '땅콩'이 쏟아진다고 하여 주위 가족을 배꼽 잡게도 하였다.


또 있다, 한 살 넘어부터 일찌감치 다니기 시작한 유아원도 엄마와 아이가 나란히 가서는
아이는 애들과, 엄마는 전문교사와 따로 육아 방법을 토론하고 온단다.


이렇듯 아이 엄마가 거의 육아 박사 수준으로 온갖 자료와 교육을 섭렵하고 있으니
가족이라고 해서 섣불리 뭘 먹인다거나 사준다거나 가르치기가 아주 조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 딸네 가서 한 달 푹 쉬고 오겠다던 모친에게 모든 게 순조로울 리 없는 거다.
아이에게 표현 한번 잘 못 썼다간 딸내미로부터 대번에 퉁박이 날라오고
사사건건 삐익- 경고음에 옐로우 카드다.


그러다 화근이 된 사건이 급기야 생기는데,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아이가 암튼 물을 너무 무서워해
샤워실은커녕 아동용 목욕통조차 엄두를 못 내는 통에
아이를 작은 싱크대에 올려놓고 몸을 닦아 주더라는 것이다.


이 광경이 아이 할머니 눈에 찰리가 없다.
"아니, 아이가 물을 무서워하면 그 공포증을 극복시켜 수영을 하루빨리 가르칠 궁리를 해야지,
두 살이나 된 다 큰 애를 싱크대에 올려놓고 그리하면 되겠냐
?"


그에 발끈한 딸내미는,
"아무리 아이 할머니라 해도 아이 엄마의 자녀 육아 방식에 대한 도전은 월권!"이라며,
그리 잔소리를 하시려면 차라리 집에 돌아가시라 한마디 홧김 말을 던지고,
그에 무례함과 서운함을 느낀 모친은 "그래? 그러면 나 집에 갈련다!" 며
택시를 잡아타고 쌩- 밴쿠버로 하루 만에 돌아오신 거다.

 


 

 

 

상황이 눈에 그려져 듣는 내내 웃음이 새어나온다.
"아니, 무슨 두 살이나 넘은 큰 애를 싱크대에 올려 넣고 목욕을 시킨대요 그래? 하하.
애 엄마가 은근히 육아 엄격주의자인 줄 알고 있었는데 그런 걸 보면 또 그것도 아닌가 벼요~" 하니,
"누가 아니래냐" 며 눈 찡긋하신다.


서운하고 노여운 마음에 막무가내로 돌아오시긴 했지만
당신 남편을 심장합병증으로 재작년 먼저 떠나 보낸 후 홀로 외로움이 부쩍해진 그 마음 헤아려져
남편과 늦은 저녁 두어 시간을 그녀 집에서 함께 해주고 돌아왔다.


북미나 유럽에선 아이를 이렇게 키운다더라, 교육을 이렇게 한다더라, 아무리 그러해도
바람불면 날아갈세라 금지옥엽으로 키우는 시누이 같은 모성은 나라를 막론하고 이렇게 지구촌 어디에나 있는 듯싶다.
그를 두고 맞네 그르네 하며 한편으로만 단 정지을 순 없는 일 또한 아니겠는가.


며칠 지난  어제, 리다가 까미랑 화해하셨을까? 라 남편에게 물으니
보나 마나지 뭐. 한다.
맞다, 당연한 걸 내가 또 물었다. 하하.

 


 

 

- 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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