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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와의 추억

어떤 크리스마스 선물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어느 12월,
볼일이 있다며 외출을 한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지금 뭐 가지구 들어갈 거 거든, 신호 줄 때까지 거실로 나오지 마, 알았지?"


때가 때이니만큼 크리스마스 깜짝 선물이라도 들고 오는가보다 싶어
내심 흐뭇한 맘으로 방에 얌전히 숨어있으려니 마침내 남편 들어오는 기척이 난다.
그런데 저벅저벅 끙끙 소리에 우당탕탕, 마치 이삿짐이라도 들여오는 듯 밖이 부산하다.
아니, 뭔 깜짝쇼 준비가 저리 요란한거여...


남편의 큐 싸인이 드디어 들리고 신이 나버린 아이처럼 거실로 뛰쳐나간 나,
잉, 이게 뭐야?


짜잔! 거실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 잡은 내 키보다 한 뼘쯤 더 높은,
작은 침실 반쯤은 족히 차지할 듯 커다란 새장,
그 한구석에 완전히 얼어붙은 모습으로 온갖 의심의 눈초리로 노려보는

내 팔뚝 길이만 한 야생의 두 살배기 노오란 새!

 

으응... 이뿌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어정쩡한 표정으로 그날 밤은 그냥 보냈다.
한달 생활비쯤의 거금을 거뜬히 들였을, 아내를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이 아니겠는가.
그리곤 크리스마스가 지나기 무섭게 이후 며칠간 '대화 전면 거부'로써 남편에게 내 불만을 표했다.
내가 하루하루가 그리 한가하지만은 않은 사람이란 걸 모를리 없던 그가
일반 관상조도 아닌 이렇게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선물 아닌 선물을
무턱대고 들이민 사실이 정말 야속했기 때문이었다.


'참새처럼 그저 좁쌀이나 콕콕 찍어 먹는, 말 몇 마디 할 줄 아는 새'라는 게
앵무에 대한 내 황당 지식의 전부였던 그때, 나 더러 어떡하라고...
앵무새 키우기가 자녀 입양하는 것과 같은, 대단히 힘들고 심장 떨리는 일라는걸 그때 알았더라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앵무를 입양하면 치러야 하는 절차,
앵무 전문 수의사에게 '정밀종합검진'을 받게 하는 일.
손대기는커녕, 새장 근처에도 얼씬할 수 없을 정도로
전혀 길들지 않은 야성의 새였던 그 아이를 상자 속으로 옮겨 넣기까지
남편과 나는 상처뿐인 영광의 세계 제4차 대전을 치러내야 했다.


피검사를 포함한 검사 결과
'특히 다리 근육이 잘 발달한 아주 건강한 계집애'라는 좋은 결과를 얻었으나,
근 수백 달러에 달하는 비용도 비용이려니와, 종종의 정기검진은 물론이고,
야생조에서 애완조로의 탈바꿈을 위한 메이크오버, 멀고도 험한 길이라니.


남편에게 '도로 무르고오라!'며 단식투쟁까지 벌이다시피 한 며칠이 지나면서
에혀... 죽거나 말거나 나 몰라라 할 수도 없고,
더더구나 일단 구매한 조류는 반환 불가능한 상황이니...

 

 


내 한눈 판 틈을 타 자기 몸집만한 만다린 껍질을  바닥에서 훔쳐  

높은 횟대까지 끙끙 끌고 올라간 고질적 도둑, 힘쎈 케이양.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던가,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마음을 겨우 가다듬고 찬찬히 뜯어보니
파스텔 노랑 몸체에 진분홍빛 부리의 그 예쁨이 눈에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한다.
특히나 그 또롱또롱한 사람 같은 눈으로 우리 눈치를 요리조리 살피며
조심스레 모이를 먹는 모습은 다름 아닌 꼭 두 살배기 아가의 모습이었다.


그래, 어차피 이것도 인연일 터인데...
처음 얼마간의 포기와 좌절을 겪으며 내로라하는 앵무전문가들을
손품 발품 열심히 찾아다니면서 앵무에 대한 지식을 쌓기 시작했다.


아침에 연습시킨 명령어를 저녁에 바꾸어 버리던 나의 엉망진창 무일관성과
초반 무지함의 결과로 땅바닥에 떨어진 서열과 파워를 되찾아 '넘버 1'이 되려는 나와,
절대로 선두를 빼앗길 수 없노라는 머리 좋은 케이와의 처절한 머리싸움이 이어지고,
알면 알수록 혀를 차게 하는 그들의 영특함과 사람 같음에 눈을 뜨면서,
한때 조류전문수의사로의 직업 전환 포부까지 갖게 했던,
나의 앵무에 대한 사랑은 이렇게 남편의 '반강제' 크리스마스 선물인
노오란 인디언링넥 (Indian Ringneck)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신, 혹시 케이랑 사귀고 있는 거 아냐?
아내의 보물 제1호였던 본인의 우선순위가 이렇게 바뀔 줄 알았다면
절대로 앵무새 크리스마스 선물 안 했을 거라는 그이의 투정 어린 농담.


한번은 남편이 친구들에게 이런 불평을 하더란다.
이른 아침 비몽사몽 중, 귓전에 스치는 감미로운 목소리, “긋모니잉~”.
눈을 지그시 떠보니 눈앞에 보이는 건 몸을 새장 안으로 반쯤 구부린 채
우리의 앵무새 케이양에게 모닝 키스를 열렬히 보내고 있는
아내의 동그란 엉덩이뿐이더라고...

흐흐.

 

 

 

 

 

 

 

 

 

 

 

 

 

 

 

 

 

 

 

 

 

 

 

 

 

 

 

 


 
여러분 모두 즐겁고 뜻깊은 크리스마스 보내셨지요?^
 

 

- 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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