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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놀기

철 든 여자

 

 

 

 

두 달 전쯤, 정기 건강검진 시기가 되어 훼밀리 닥터로부터 검사 스케쥴을 받았다.
스케쥴대로 피검사를 하고, 며칠 후 결과 검토를 위해 닥터와 마주 앉으니
내 앞에 'ㄱ(기역)' 선이 그려진 그래프를 내 놓는다.
수년간 모니터링해 온 내 철분 수치를 나타낸 것이다.


고개를 갸우뚱해 있는 내게 닥터가 설명을 한다.
몇 년간 일정한 수치를 꾸준히 나타내며 상위 평행선을 유지했던 철분/히머글로빈 지수가
어느 시기부터 갑자기 낭떠러지로 떨어지듯 급강하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라는데,
"그런데 왜 최근 몇 개월간은 숫자가 없는 거예요?" 하고 물으니
점점 떨어진 수치는 아예 그래프 최하점인 '0'을 지나
더는 수치를 나타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란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잠시 어디론가 사라졌다 돌아온 닥터는
철분지수가 이렇게 떨어진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며
급한 대로 지금 자기 앞에서 두 알을 복용하라며 철분제 몇 알을 건넨다.


건네준 물로 두 알을 꼴딱 넘기고선
"아시다시피 원래 제 생리가 무지 해비하쟎아요, 혹 그런 이유는 아닐지...?"


그 때문이라면 차라리 다행이지만
몸 다른 어딘가에 피가 세는 곳이 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며 정밀 검사를 해보잔다.
쿡...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 몸이 어디 고무풍선이간디 바람 빠지듯 피가 세게.

 


 

사실 최근 들어 내 몸에 전에 없던 이상한 증세가 생기기는 했었다.
심심하면 생기던 빈혈이 조금 더 심해진 건 그렇다 치더라도,
마치 엘러지라도 생긴 듯 피부와 두피가 간질거리는 이상스런 증세라든가,
심한 가뭄에 땅 쩍쩍 갈라지듯 하루가 멀다고 입 양 가장자리가 허는 것 하며,
특히나 미각이 비정상적으로 예민해져 그야말로 '물'만 빼고는
모든 음식이 입속에서 장작 타듯 활활 매운 느낌은 또 어떤가.
거기다 취침시엔 양다리에 알지 못할 피곤함으로 쉴새 없이 꼼지락거려야 하는
restless legs 기미까지 보였다.


이 모든 일련의 증세들이 극도의 철분결핍 때문이었단 걸 내가 알았을 리 없다.
종종 있어 온 빈혈이야 뭐 항상 많은 생리량 때문이려니 했고,
피부 가려움증은 스킨이 건조해서 그런가 보다 했다,
또 과민해진 미각이야 원래 매운 음식을 못 먹는 식성이니...했고,
입 가장자리 허는 일은 그저 채소를 멀리한 죄로 바이타민류가 부족해서 그런가 싶었었다.
얼렁뚱땅 자가 처방전으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 했던 거다.


 

며칠 후 훼밀리 닥터의 스케쥴대로 정밀 검사를 한 후
결과가 나왔단 통보를 받고 다시 그녀와 마주 앉았다.
몸 어디에도 '피가 세는 곳은 음따!'란 희소식이었다.
"다행예요, 접착제로 꾹꾹 땜질할 준비를 했었는데." 하니 남편과 닥터가 웃음을 터뜨린다.


일단은 처방해준 강력철분제를 계속 복용하면서
한 달 후 다시 피검사를 하여 수치 변화를 살펴보기로 하고 클리닉을 나섰다.


그깟 철분 결핍 하나가 자아내는 그 많은 불협화음이라니...
영양에 태만하고 몸이 쏘아대던 경고신호를 마냥 무시하며
군것질과 인스턴트 식품으로 허기 채우기 부지기수,
불쌍한 내 몸이 그간 참으로 많은 고생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몰려온다.


사실 일주일이면 샐러드 한 접시 맘먹고 먹어본 적이 없을 만큼
채소를 질색하는 내가 아니던가,
게다가 그 철분 풍부한 red meat 을 우리 부부가
이런저런 이유로 거의 입에 안 댄 지는 몇 년인지 모른다.
히머글로빈 저하로 닥터 말처럼 당장 큰일이 날 수도 있겠단 생각에 겁이 덜컥 들었다.


결심은 의미심장했다.
당장에 온갖 채소를 망라한 베지스무디 (vegetable smoothie) 를
아침마다 두 컵씩 갈아 마시는 일에 착수했다.
스무디는 주스와 달리 채소 껍질까지 통째로 블렌더에 걸쭉하게 갈아 마시는 거다.
채소든 과일이든 그 영양가는 모두 껍질에 다 들어있다쟎은가.
Apple, Kale, Red Beet, Spinach, Carrot, Parsley, Celery, Broccoli, Swiss Chard,
Bell Pepper, Fennel...
지금까지 이렇게 많은 채소를 섭취해 본 적은, 히유 세상에나, 없었다.


몇 년 전에 시어머니께서 철분보충에 좋다며 사주셨던 cast iron 조리기구를 다시 꺼내쓰기 시작했고,
남편도 한 몫 거들겠다며 liver(간) 레서피를 찾아 직접 요리해 주기도 했다.
이번 여름 푸짐히 사두어 냉동실을 빵빵히 채우고 있는 사카이 세먼(연어)도
하루걸러 한 번씩 식탁에 올랐다.
이런 철분 수치 끌어올리기 노력은 한 달 내내 단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졌다.

 

 


 

 

드디어 한 달이 지나고 다시 피검사를 했다.
결과를 두고 마주 앉은 닥터가 다시 그래프를 내놓는데,
한 달 전 ㄱ(기역) 으로 끝나있던 그래프 끝이 흠마나,
한 달 사이 강아지 꼬리마냥 위로 빠끔히 쳐들려 있었다.


내심 기대했던 것에는 못 미치는 수치라 다소 실망스런 빛을 내가 보이자
그럼 겨우 한 달간 철분제 복용에 수치가 대번에 정상으로 되돌아갔길 기대했던 거냐며,
그래도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히머글로빈 수치가 많이 올라갔기에
절대 작은 성과가 아니라고 닥터는 용기를 준다.


앞으로 계속 철분제를 복용하며 지금처럼만 관리하면 된다는 닥터 말에,
이렇게 철분제를 계속 더 복용하다간
혹 철분 과다로 iron poisoning 이 생기는 건 아닌지 슬며시 걱정을 표하니
"그런 걱정은 무쇠로 된 대형츄럭 한대를 지금 당장 잡아먹고,
앞으로 20년간 이 철분제를 복용한 후에나 해도 될 것" 이라며
내 한참 앞서 간 기우를 단숨에 지워준다.

 


 

이참에 그간 소홀했던 다른 영양소까지 본격적으로 챙기자며 남편은
오메가 3이며 바이타민 C와 D, 프로틴 셰잌 등 온갖 영양제를 한 아름 사 들고 온다.
베지스무디 준비에 더욱 바빠진 아침 출근 시간이지만
처음으로 이렇게 건강을 열심히 챙기는 나 자신이 너무나 든든하고 대견할 수가 없다.
이렇게만 하면 백 세 무병장수가 거뜬할 것도 같다.


세안 후 거울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남편에게로 뛰어가
그의 손을 내 얼굴에 가져다 대며 호들갑을 떨어본다.
"자갸, 여기 내 얼굴 좀 함 만져봐 봐, 무지 부드럽고 촉촉해졌지. 그치? 그치?"


더욱 신기한 것은,
이전의 그 여러 증세가 철분 보충을 시작한 이래로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거다.
어리럼증도, 피부 가려움도, 잠을 설치던 다리 피곤함도,
퇴근 후면 카우치에 앉아 병 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던 피곤함도 모두 자취를 감췄다.
의욕과 에너지가 한층 넘치고, 왠지 모든 일이 신 나고 즐겁다.


You Are What You Eat.
이 말에 담긴 놀라운 의미를 새삼 실감하는 요즘이다.

 

***

 

 

 

 

 

 

 

 

 

- 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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