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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놀기

익명뒤에 숨은 두 얼굴

 

 

 

 

 

 

모 신문사의 한 해외 통신원클럽 방장을 맡고 있을때였다.
주로  삶에 관한 진솔한 이야기와 사진, 음악이 있는 열린 공간이었는데,
연령층도 다양해서 50, 60대 맴버들도 제법 되었지 않나 싶다.


실명제가 아니었던 그 당시라 대개 익명으로 활동이 이뤄졌고,
방장이라해서 회원이나 글 게시자에 대해 알 수 있는 개인정보는 거의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고정 맴버들간의 친근감도 무르익어갈 무렵,
하루는 한 맴버가 다소 선정적 사진을 담은 게시물을 올리는 일이 생겼다.
그리 심한 수위는 아니었지만,  당시 그 게시판에서 물줄기로 삼고 있는
정갈하고 진지한 이미지와는 다소 어긋난다는 판단이 섰다.


곰곰 생각 끝에, 그에게 (여기서 그의 남.여 성별은 밝히지 않겠다) 
이곳 취지와 잘 맞지 않는 듯 하니 게시물을 내려주시면 어떨까 하는 부탁을 했다.
마음 상하게 할 수 있는 일인지라, 나 나름대로는 아주 조심스럽고 정중하게 구한 양해였다.


하지만, '뭘 이런 정도 가지고 쫀쫀하게?' 하는 식의 발칵하는 의외의 반응이 그에게서 나왔다.
어쩔 수 없이 내 손으로 그 게시물을 내려야 했고,
내리고 난 후에도 그럴 수 밖에 없었노란 미안함을  그에게 재삼 표현했던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 게시물 사건이 그로 하여금 스토커식 불타는 복수심을 갖게 할 줄이야.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한동안 발길을 끊던 그가 사이트에 재등장 하면서 다른 여러 익명으로 물을 흐려놓기 시작한다.
방장으로서 자기방 맴버들에 대해 알 수 있는게 거의 없던 당시였지만
모두의 아이피 (IP) 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만은 있었다는 걸  
당시 다른 방장들도 그렇고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거다.


그 사실을 모른채 얼굴에 열심히 혼자만의 가면을 쓴 그는 다른 여러 익명으로
내가 꼬리가 열 달린 백년묶은 여우라는 등 헛소문으로 내 등뒤에서 모함을 시작했다.
(불행히도, 그때나 지금이나 난  '여우'과 보다는 '곰'과다 사실은)


그렇다고 '난 당신이 누군지 아오!' 하며 그의 실체를 따져묻거나
공개적으로 드러내고픈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적어도 같은 부류로 전락해선 안된다는 의지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다시 내 클럽에 발길을 이으면서 스스로 재무장한 그의 '공식적' 모습은
차라리 한마리 '고고한 학' 이고자 했기에, 그 탈을 벗겨 망신을 주는 일만은
차마 할 수가 없던게 더 큰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공식 아이디로는 고고한 게시물을,
또 다른 제 2, 3 익명의 아이디로는 게시판 코드에 어긋나는 저속한 글과 사진들을 올렸다.

 

 

 

익명제던 실명제던 둘 다 양날의 칼과 같음은 분명하지만, 난 개인적으로

특히 프라이버시 침해 부분에 관해서는 실명제에 적극 반기를 드는 한 사람이다.
이름자 클릭한번이면 신상명세 꽤기가 그리 어렵지 않은게 요즘 세상 아니겠는가.


당시 익명의 순기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채 악용.오용을 일삼던 이는 비단 그만이 아니어서,
먼발치에서 때론 재미있게, 때론 어이없게, 그리고 때론 울분스런 마음으로
그들의 각종 탈을 그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심정으로 바라만 볼 뿐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당시 막 시작된 블러그/카페제 도입과 함께 통신원 클럽이 해체되게 된다.
다른 형태의 까페를 만들어 헤쳐모여 한 클럽도 있었지만,
대개는  각각 개인 블러그를 만들어 서로 farewell을 고했었지 않나 싶다.


그도 대세에 맞춰 개인 공간을 오픈하고 블러깅을 시작한게 보였다.
멋들어진 사진들과 삶의 관조가 엮어진,
그와 교류를 하고 있던 대다수 블러거들 눈엔 무척이나 지순하고
고고한 블러거라 비췄을 법도 한 그런 블러깅 칼라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감춰진 또 하나의 얼굴은 여전히 살아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쩜 multiple personality disorder(다중인격장애) 에 시달리고 있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통신원 클럽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른 아이디를 뒤집어 쓴 그는
여전히 내 개인 블러그와, 당시 다른형태의 개인카페로 전환해 통신원 맴버들이 집합해있던
내 새로운 카페에 드나들며 예의 그 천사와 훼방꾼의 A, B, C 탈을 교대로 갈아 썼다.
사사건건 대응하기엔 그의 시도들이  참으로 유치하고 터무니 없음에
별거 아닌듯 무대응으로 맞섰지만, 내내 편치않던 a pain in the neck 이었음은 사실이다.
 

이런 그의 일인다역 퍼포먼스가 중단된 시점이 아마,
내가 일상스케쥴에 변동이 생겨 더 이상 여유가 없어지는 이유로
오랜간 온라인 활동을 전면 중단했던 때가 아니었나 싶다,
아니 사실은, 활동을 중단했던 기간동안 나 자신 단 한번도 온라인에 손을 안댔으니
그가 이후로 어떻게 어떤식으로 쥔장없던 까페를 휘젖고 다녔었을런지는
내가 알 수 없는 일이긴 하다.


장기간 부재를 깨고 다시 온라인에 돌아온 내 눈에
그의 흔적은 내가 어쩌다 발길하는 이곳 저곳서 여전히 눈에 띄고,
이젠 모두가 떠나 과거의 아름다웠던 추억 창고로만 보존되고 있는 옛카페에도
잊을만 하면 한번씩 암호 낙서가 남겨지고 있다.
난 그냥 웃는다.  그리고 소리없이 지우면 될 뿐이다.

 

 

 

 

 

 

그는 아마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내내 알고 있었다는 걸, 
그리고 앞으로도 알게 될 것이라는 걸.
 

그가 아무리, 삶의 애환에 흐느끼는 누군가의 어깨에 손을 얹고
세상에서 가장 너그럽고 인자한 목소리로 토닥거리고 있을지라도
난 그의 익명뒤에 숨겨진 또 다른 제 2, 3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을수가 없다.
 

 

I want to be solid in my presence like carved stone

But I am water, and I slide through the cracks of my soul

Spiling out and over in every which direction

I cannot retain any of myself...

 

- “Am I Still Here?” by Morbid Maggie 중에서 -

 

 

  

- 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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