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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놀기

시아버지 첫 생신상

 

 

 

 

"우리딸 그렇게 음식만들길 싫어해서 이담에 어떻게 시집갈꼬?"
주방 들어가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어린 딸내미를 보며 웃음반 걱정반이시던 친정어무이의 말이다.


"언니두 참, 요즘에 요리 직접해 먹는 가정이 얼마나 된다구.
글구 자기 팔자는 자기가 만든다고, 요리를 즐겨봐 봐, 허구헌날 주방에서 맴도는 삶이 될테니."
요리에 역시 취미가 없으셨던 듯한 이모의 조카 편들기다.


정말 요리가 질색이다 난.
'요리'라는 고급스런 표현도 필요없이 그저 음식을 만드는 일이란
내게 있어 가장 고역스러운 일이요, 정말 하기 싫은 일 중 하나인 거다.


나:  하길 싫어해서 그렇지, 내가 하문 또 맛있쟎아, 그치?
짝:  하문 맛있다구...? (키득키득)

 

그러다 보니 음식과 관련된 블러그나 사이트엔 관심도 없고 발길을 주지 않는다.
절친한 블러그 이웃이 간혹 직접 만든 맛난 레서피를 올릴라치면
그저 군침만 뚝뚝 흘리면 그뿐, 부럽다거나 꼭 시도해봐야겠다 하는 생각은 커녕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요리'란 것이 내 결혼생활 To Do List에 들어갈리가 없다.
이를 백번 존중하여 스스로 그 부담을 혼자 다 떠맡아 주는 짝지,
고맙기 짝이 없지만, 그 덕분에 내 요리솜씨가 '발전'기색을 보일 확률은 그나마도 '꽝'이니
이런 추세로 가다간 서당개도 삼년이면 끓이게 된다는 라면도 하나
제대로 못 끓여먹기 딱 쉽상인 거다.


양심상 어쩌다 큰 맘 먹고 팔을 걷어부치고 주방에 들어갈라치면
글쎄 썰라는 재료는 놔두고 그새 손가락부터 여기저길 베어
밴디지 가져오라 징징거리기 바쁘니 (난 아픔에 대한 엄살이 무척 심하다),
이젠 아예 날더러 가만히 있는게 도와주는 거라 부탁할 지경이랄까.


가족이고 친구고 이런 내 아킬리스건을 아는 사람은 다 알기에
무슨 날이고 기념이라고해서 내게서 음식장만같은 헛된 기대를 하는 일이란 거의 없다.
예컨대, 내 생일저녁은 짝지가, 짝지 생일땐 시부모님이,
시어무이땐 시아부지께서, 시아부지땐 시어무이께서,
이렇게 나만 제외한 모두들 제 몫을 보태는 거다.
 

친정어무이 말대로, 전통 한국가정에 시집을 왔더라면 큰 곤란을 겪을 뻔 했다.
그렇다고 해서 요리를 못하는 것을, 혹은 즐겨하지 않는것을

나자신 한번도 여성으로서의 단점이나 문제점, 혹은 창피한 일이라 여겨본 적은 없지만,

어릴적 점장이 할무이가 하셨더란 말처럼,
정말 "인복 하나는 엄청 타고 난"게 틀림없는 엘리 아닌가.

 

하지만 인복 하나만 믿고 언제까지 배만 째랄순 없는 일이다.
시부모님 생신때면 가족 외식을 제외하곤 매번 당신들이 준비해놓은 생일상에
달랑 몸만가서 입만 호강해가지고 돌아오는 일에 서서히 죄책감이 생기기 시작하던 어느 해,


나:  이번 짐(시아부지) 생신땐 내가 저녁을 만들어 볼께!
짝:  아부지가 좋아하시겠다~ 그런데 뭘 만드실라구?


그래도 명색이 오리지널 한국인인데 뭇진 한국 음식 한번 소개 안하고서야...하는
스스로의 '부담감'으로 가족과 친구들에게 몇 차례 불고기 바비큐를 선 뵈긴 했지만,
(그래봐야  만들어진 양념장 사다 버물버물한게 전부지만)
그걸 시아버지 생신때 또 만들기엔 좀 그렇다.


올해 아부지 생신상은 이 며느리에게 맡기시라!
모두에게 큰 소리를 일단 탕탕쳐놓긴 했는데...

 

오키


고를 것도 없이 손가락 몇개만 꼽으면 꽉찰 내 요리 레퍼토리에 한숨을 쉬고 있자니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는 듯 외치는 짝지, Korean dumpling soup!


맞다, 떡만두국이 있었지!
냉동만두 냉동떡 사다가 물 붓고 끓이면 되는
초보자에게도 어렵지 않은 만만한 레서피이기에 짝지와 몇차례 만들어 먹은적이 있긴 하다.


흔쾌한 합의가 이뤄져 한국 마킷으로 달려가 재료들을 사왔다.
- 냉동만두와 떡
- 스튜용 소고기
- 구운김


드디어 그 날이 오고, 저녁 초대 시간에 맞춰 물을 끓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고민이 생겼다.
평소 두 사람 분량에만 익숙해져 있다보니
인원수에 맞춰  음식 양을 얼만큼 만들어얄지 감이 안 잡힌다.
그렇다고 남아서 버릴땐 버리더라도 일단 많이 만들고 보자, 하는 성격은 내가 또 아니쟎나.


커다란 팟에 500ml한 컵... 두 컵... 세 컵...물을 채운 후
마늘과 스튜용 소고기를 잘게 썷어 넣고 끓이기 시작한다.
 

다음 타자는 만두와 떡인데..
도대체 각각 얼마만큼씩을 넣어야 할지가 난감이다.


나:  일인당 만두와 떡을 몇개씩 따져야 할까?
짝:  글쎄... 많이들 먹을 것 같진 않으니까.... 걍 일인당 만두 두개랑 떡 일곱개쯤?


만두 하나 퐁당... 만두 두개 퐁당...
떡 한개, 떡 두개, 떡 세개....퐁당 퐁당...


그렇게 초대 손님 머릿수에 맞춰 계산된 떡과 만두가 부그르르 끓기 시작하자,
와우... 이 맛난 냄새가 무슨 음식이지? 하며
그새 와 두런두런 얘기꽃을 피우고 있던 가족과 지인들이 호기심들을 보인다.


"올해 dear daddy의 버쓰데이 디너는 요리의 달인 엘리의 Korean cuisine ~~~"

 

부끄

 


드디어 나의 그 Korean cuisine 이 테이블 위에 올려질 시간이다.


소금과 후추로 간을 맞춘 후
보울과 국자를 집어 들고는 부글부글 끓고 있는 커다란 팟을 들여다 본다.


에그그...
태평양에 만두 몇개와 떡이 애처롭게 동동 떠다니는 형국이라니...
멀뚱멀뚱 떡만두국, 맛을 보니.... 맛이라고 다를까.


"물을 넘 많이 부었나바.. 아님 뭐가 빠졌던가...흑..."


괜찮아 괜찮아 하며 짝지가 손수 떡만두국을 보울에 담는다.
한 그릇에 만두 두개와 떡 일곱개씩,
그리고 요리책에서 본대로 그 위에 구운 김 부스러기 솔솔.


핫, 그런데 참기름과 깨소금을 잊었다!
그렇다고 가까운 거리도 아닌 한국마킷을 이제서야 달려갈 수도 없는 일이고.
색상도 돋울겸 걍 케첩이나 한방울 똑 떨어뜨리지 뭐.

 

 


 

 

설날도 아닌 때없는 태평양 동동떡만두국이 시아버지 생신저녁으로
아무 반찬도 없이 그렇게 달랑 한 그릇씩 올려지고,
맹숭맹숭한 맹탕 국물을 호호거리며 그래도 맛나다, 고맙다, 수고했다란 푸짐한 칭찬으로
초라한 생일상의 송구함과 부끄러움을 잊게해 준 고마운 시아버지와 가족들.


이렇게 치뤄진 재작년 이맘때의 시아버지 생신상은
예기치 않은 심장수술 후유증으로 이듬해 우리와 슬픈 작별을 고하심으로
이후 조금 나아진 내 떡만두국 솜씨를 더 자랑할 기회도 없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끝이 나 버렸다.....


'아부지, 천국의 천사들은 모두 참말만 한다지요?
솔직히 말해 보세요, 그때 그 동동 떡만두국이 참말 맛있었던 건지.^^'

 

 

 


- 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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