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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놀기

자정이면 걷는 아이

 

 

 

 

 

그때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쯤이었을까,
엄마의 갑자기 바빠진 직장일로 엄마품을 잠시 떠나
막내이모댁에 맡겨져 시간을 보냈던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신혼이나 다름없던 막내이모에겐 갓난딸 (내겐 이종사촌인)이  하나 있었는데
이제 막 발자국 떼며 걸음마를 겨우 시작한 어린 아가였다.


평소 배만 부르면 새근새근 잘 자던 순딩 아이,
이 아이가 어느 날 부턴가 자정무렵만 되면 몸을 뒤척뒤척하다 잠을 깨더니
갑자기 입술이 파래지며 자지러질 듯 서럽게 마구 울기 시작하는 거다.


더욱 믿지 못할것은, 이모나 이모부가 양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
온몸의 균형을 지탱해 주고서야 겨우 한 발자국씩 걸음을 떼곤했던 이 아이가
이시간이면 부축없이도 넘어지지 않고 뒤뚱뒤뚱 홀린 듯 잘 걷는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방 한가운데서 둥글게 원을 그리며 반쯤 눈감은 모습으로 말이다.


그럴때마다 이모 부부가 놀라움 반 두려움 반으로 아이를 제지하려 하셨던 것 같고,
또 그럴때면 아이의 버둥거리는 울음은 더욱 심해졌던 것 같다.
그래 나중엔 아예 맥 놓고 보는 수 밖에 없었다고나 할까.


그렇게 정신없이 울며 뱅뱅 돌기를 약 십여분 쯤 (아님 몇 분, 몇십분쯤),
갑자기 픽 쓰러져 언제 그런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잠에 빠져버린다.


그게 이상한건지 어떤건지도 파악이 쉽지않던 어린 나이였음에도,
수일 지속되는 이 괴기스런 현상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이모 부부의 모습에서
난 그게 결코 정상이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다.

 

얼굴에 수심을 담은채 외가를 들락날락 하며 갑자기 바빠지기 시작한 막내이모.
어느 날 날 불러앉히더니, 오늘 밤에 손님 방문이 있을 예정이니
그 손님이 오면 아가방에 있지말고 거실로 나가 얌전히 있니라 하신다.

 

 


 


해도 지고 밤 쯤 됐을까.
나와 잠든 아가를 집에 놔두고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진 막내이모는
한참후에 손에 작은 보따리가 들려있는 어느 노년의 낯선 여성과 함께 집에 돌아오셨다.


이모의 눈짓을 받은 나는 곧바로 그들 시야에서 벗어나 거실로 자릴 옮겼고,
막내이모와 그 여성이 있는 아가방의 방문이 곧 닫혔다.


조금 있으려니 감을 잠을 수 없는 금속성 소음이 간간히 들리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나즈막한 웅얼거림이  그 방에서 새어나오기 시작한다.
무언가 신비스런 일들이 그 방에서 벌어지고 있는게 분명했다.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에 휩싸여 버린 나는 살금살금 그 방으로 다가가
닫혀있는 문을 살짝 안으로 밀어내고 머리를 살그머니 디민다.


방 한 가운데에 아이가 누워 잠든 모습이 보였다.
그 아이 머리맡께로 두 여인이 나란히 앉은 모습도 보였는데,
낯선여인은 손에 든 책같은 것을 쉴새없이 읽어 내려가고 있었고
그 옆에는 다소곳히 막내이모가 앉아계셨다.


잠든 아이와 두 사람 사이에 놓여진 작은 냄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안에 무언가가 들어있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건 참깨나 들깨가 아니었나 싶고,
그 깨가 들어있는 냄비 위에는 커다랗고 시커먼 부엌칼이 가로질러 걸쳐져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순간 뭔지모를 섬칫함에 머리털이 쭈뼛 섰던 것 같다.


그렇게 두어시간쯤이 흘렀던가...
아마 자정이 거의 다 돼가던 시각이었나 보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웅얼거리며 읽고 있던 그 여인의 목청은 점점 커지고 읽는 속도도 점점 빨라져 갔다.
마치 마음속 기도에 정성을 더하는 양
옆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이모의 꼭 감긴 눈에 더욱 힘이 주어진 듯도 보였다.

 

 

때에엥... 자정이다.
잠자고 있던 아이가 역시나 몸을 조금씩 움찔움찔하기 시작한다.


그 여인의 주문도 더욱 더 빨라지는 듯 했고,
이를 몰래 지켜보고 있는 내 심장도 덩달아 정신없이 쿵쿵거렸던 것 같다.


몸을 점점 더 뒤척거리며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기 시작한 아이의 모습을 보건데
아마 바로 지금까지의 일들처럼 이제 잠을 깰 양인가 보다.


곧 예의 그 빙빙도는 세레머니가 이어지겠지...
마치 폭풍전야같은 전율이다.


그런데...
막 깰듯이 몸을 뒤척이기 시작하던 아이의 움직임이 갑자기  멈췄다.
그리곤 조용하다.


아이가 다시 깊은 잠속으로 빠져든것처럼 참으로 고요했다.
갑자기 시작되던 자지러진 울음도,
벌떡 일어나 방안을 빙빙 돌던 그 기괴한 뒤뚱걸음도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쌔액 쌔액 숨 쉬는 그 아이의 평온한 모습위로
자정도 훨씬 지난 늦은새벽까지 그 여인의 심각한 주문은 여전히 이어졌고,
동이 틀 무렵에서야 겨우 끝이났던 것 같다.


모든 과정을 끝낸 그녀는 지친모습으로 간단한 인사말을 이모에게 건넨 후
바쁜 걸음으로 총총 사라졌고,
그날 이후로 그 아이의 이해할 수 없을만큼 괴기스러웠던 그 행동은 더 이상 볼수가 없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어깨너머로 들린 집안 어른들간의 쉬쉬스런 밀담에 의하면,
이모의 친정엄마, 즉 나의 외할머니께서 그 일 있기전 이모집에 한동안 묵었다 가신적이 있었다 하고,
이후 얼마 안돼 외할머니께서 어찌어찌하여 돌아가셨으며,
자정이면 일어나는 그 아이의 괴기한 행동이 그 직후에 시작되었다는 부분에선
호기심 충만한 당시 내 어린두뇌에 상상력이 한껏 불어넣어져
그로인해 완성된 공상소설이 내 기억을 지금껏 ‘실화’란 혼돈속에 몰아넣고 있는건 아닐까 싶을만큼
너무나 픽션스럽고 신기하기까지 했다.

 


그 아이가 이젠 성장하여 미국의 어엿한 전문직업인이 되어 있고
내겐 그날의 해프닝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한 비비드칼라로 줄곧 남아 있지만,
왜인지 지금까지 단 한번도 그 아이에게, 그리고 막내이모에게
그 사건에 대해 언급하거나, 혹은 본인이 알고 있는지 조차 물은 적이 없다.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 마음 한켠에 새겨져 버린 '타부'라는 두 글자가
지금까지 내 입을 이렇게 꼭 다물게 만들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 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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