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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놀기

슬픈 아내의 작은 부러움

 

 

 

 

 

저녁 먹으러 오란다.
어찌어찌 건너건너 알게 된 세 살쯤 된 아들 하나를 둔 아랍계 부부다.

 
가는길에 부부가 술은 전혀라니 와인대신 자그마한 케잌 하나와 꽃 한 묶음을 사고,
초대해 주어 고맙다는 간단한 인사카드.
 

문을 열고 부끄러운 듯 조용조용 우릴 맞이하는 무척이나 심성 고와 보이는 부부.
무표정한 얼굴로 그 곁에 서 있는 꼬마아이는 나이에 비해 많이 작은 체구다.

 
준비된 저녁식사.
초대손님에게 내오는 식찬이라기엔 마음 짠할 정도로 초라하다.
밥 한공기에 찌게 한사발 정도 라고나 할까.


민망해 어쩔줄 몰라함이 역력한 아내의 표정.
자신들은 점심을 늦게 먹어 저녁 생각이 별로 없다며 먹는둥 마는둥,
우리에게만 열심히 권한다... 많이 먹으라고 많이 먹으라고..


후식으로 펄티가 내어져 오고 우리의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테이블 옆에 선 꼬마아이는 열심히 무언가를 하고 있다.


꼬마의 표정이 참 무표정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컵 두개, 물이 반쯤 담긴 컵과 빈 컵.
꼬마는 물을 빈컵에 열심히 붓는다.
그리곤 다시 원래 컵에 쏟아 채운다.


마치 불가능한 임무라도 수행중 인 듯 진지한 표정으로
우리 대화의 몇 시간을 온전히 꼼짝않고 바로 그 한자리에서
비우고... 다시 채우고... 비우고... 다시 채우고...

 
얼굴을 똑바로 맞대고 내가 묻는다.
뭐... 하니...?

 

대답이 없다... 아니, 아무 반응이 없다.
마치 아무것도 못 듣고 못 본 것처럼.
지금 눈앞의 내 존재를 아예 못 느끼는 것처럼.
 

저기... 꼬마가 말을 잘 안하나 봐요...
 

아직까지 말문이 안 트였다는 부부의 대답이다.
걱정스러워 의사에게 보였지만, 아직 더 두고보자,
말문이 아주 늦게 열려도 나중에 달변가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란다.

 
Autism....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단어 하나가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봄이 지나고 어느 해 가을.
다운타운에서 열린 어느 벗 결혼식에 참석했다.
식사가 끝나고 무도회가 시작될 무렵, 우연히도 그 해 그 부부가 눈에 띈다.

그런데 남자 혼자다.
혼자왔냐....고 다짜고짜 묻기도 그렇고...
어정쩡 간단히 인사교환을 마친 나를 놔두고 짝지와 그는 구석 조용한 빈 테이블에 가 앉는다.
 

축하연이 모두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 짝지에게 물었다.
왜 혼자 온거래...?
아이랑 와이프는 잘 있대?
고녀석 말문은 지금쯤 트였겠지?

 

*

파란만장한 사연의 그 커플은 '정치 난민.'
자신의 나라에서 내로라 학벌과 경력을 소유한 그들이었지만
어찌어찌한 이유로 구사일생으로 조국을 탈출해 나와
새 희망과 자유의 뿌리를 내려보고 싶던 그들이
낯 설고 말 설은 땅 타국 캐나다에서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남자는 엔지니어링 전공을 살려 다시 대학 등록을 하고
여자는 어덜트 스쿨에서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다.
그런데 아이가 생긴다. 
당장 정부보조 외의 여윳돈이 필요하다. 
자신들만 바라보고 있는 고국에 남아있는 부모와 형제를 생각해서라도
공부만 하고 있을 상황이 사실 또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힘들게 재도전한 학업을 차마 예서 그만둘 수는 없던 남자 입장이라
여자가 학교를 그만두고 말 익은 동포 식당에서 잡일을 시작한다.
 

한해 두해가 지나건만 아이는 여전히 한마디 말도 못하고
담당의사는 그저 기다려 보자고만 한다.
이들에게 삶은 점점 힘들어만 간다.

 
우리가 그들에게 저녁초대 받았던 그 때가 바로 이 즈음.
손에 들려진 그들을 위한 선물 - 작은 케잌과 한 다발의 꽃, 그리고 카드.

 몇푼어치 이것들이 그리도 사치스러워 보였던가.
그들 눈, 아니 그녀 눈에 비친 우리커플의 삶이 그렇게 풍요로워 보였던가.
그녀를 좌절시킬만큼 정말 그리 대단해 보였던가.
그 누구에게도 크지않은 단 몇푼, 정말 단 몇푼어치였는데...
 

우리가 자리를 뜬 후 그녀가 밤새 펑펑 울더란다, 우리 모습이 부럽다고..
그렇게 케잌과 꽃다발과 카드를 정성껏 살 수 있는

우리 마음의 여유로움이 아주 부자처럼 보인다고...

그 작은 한톨의 여유로움이...


그 이후
그녀의 부당한 불평은 점점 잦아지기 시작하고
말문을 못 트고 있는 아이는 이런 엄마의 모든 짜증을 끄떡없는 무표정으로 받아들인다.
 

아이는 결국... autistic  이란다.
남자는 학업을 중단하고 급히 직장을 갖는다.
그러나 삶에 지친 여자의 마음은 이미.
 

결혼 피로연에서의 그는 이제 완전히 혼자였던 거다...

 

 


-  어느 해 / 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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