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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놀기

빈집 털이

 

 

 

 

 

여름 다 가기 전 과일이나 실컷 더 사다 먹자는 남편 손에 이끌려 현관으로 나섰다.
한걸음 앞서 키를 꼽고 문고리를 돌리려는 순간,
문고리가 저절로 돌아가며 문이 스윽... 열린다.


어머나, 깜짝이얏!
전기라도 통한 듯 소스라치며 뒤로 한 발 물러서려니 열린 문 너머로 한 남성이 서 있다.
그 아저씨다. 
아저씨라 하기엔 좀 들어 뵈고, 할아버지라 하기엔 좀 젊어 뵈는.


내가 키를 꼽는 순간과 그가 문고리를 밖에서 돌리는 두 순간이 딱 맞아 떨어진 게 분명하다.
순간, 혹시...? 하는 상상이 스친다.


그렇지 않은가,
남의 집을 방문했으면 먼저 초인종을 울리거나 문을 두드리는 게 순서고 예의지,
어떻게 아무 인기척 없이 살금 문고리부터 돌릴 생각을 하는가 말이다. 
혹, 나 혼자였더라면...?
여름 휴가철이라 빈집털이가 많다던데

두 사람 모두 외출해 온종일 빈집일 때가 많단 걸 눈치챈 걸까.

 

메롱

 


사실 내가 그를 가차 없이 '휴가철 빈집털이범' 혹은 '대낮 성추행범' 쯤으로 
쉽게 꽝꽝 유죄를 내려 버리려는데는 나름 이유가 없지 않다.


몇 해 전이던가, 월드컵이 한창일 때 한국을 열렬 응원하는 내 모습을 보던 남편이
어디론가 나가더니 집 대문 만한 대형 태극기를 사 들고 와 나를 무한 감동시킨 적이 있지 않겠나.
기념으로 태극기 흔들고 서 있는 내 모습을 사진 찍어 블러그에 올려야지 싶어
한적한 동네를 그 커다란 태극기를 끙끙거리며 온통 휘두르고 다녔더랬는데,
그때 어느 집 마당에 맘씨 좋게 생긴 아저씨가 마침 눈에 띄길래
내가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태극기를 들고 좌우로 흔들어 주지 않겠느냐는 부탁을 했더랬다.


흔쾌히 승낙하며 함박웃음을 얼굴에 가득 담은 그 아저씨,
장난감 든 신 나는 아이 마냥 나를 위해 사진기 앞에서 태극기를 마구 흔들어 주었고,
촬영이 끝난 나는 그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포옹을 하며 그의 볼에 가볍게 입맞춤을 해주었다.


그런데, 포옹한 그가 나를 놓아주지 않는 거다.
나를 부둥켜안은 양팔엔 더욱 힘이 주어지고, 순식간에 내 목덜미 쪽에 그의 입술이 다가온다.
차가운 혀의 느낌이 목덜미를 타고 온몸에 소름으로 돋는다.
젖 먹던 힘을 다한 밀침 끝에 가까스로 자유의 몸이 된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야말로 걸음아 나 살려라 콧물 눈물 휘날리며 집으로 내달려 왔다.


남편에게 그 사실을 말했다간 그 불같은 성격에 일이 더 커질 뿐이다.
입에 대추씨를 꼭 문 채 벙어리 냉가슴으로 놀란 가슴을 혼자 진정시키는데 며칠이 걸렸던 것 같고.
이후로 어쩌다 그와 길에서 혹은 집 근처 샤핑몰에서 마주치기라도 할 양이면
내 쪽서 서둘러 다른길로 빙 돌아 가곤 하는 수고를 해야 했다.


그와의 전력이 이러하니 내 눈에 그의 행동이 고와 보일 리 없지 않겠나.

 

no2


고개 돌려 남편과 눈을 맞추었다.
남편도 나와 크게 틀리진 않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 싶어 범죄처리위원회에 배턴 넘기듯 남편 뒤쪽으로 한발 물러섰다.


"아저씨이~  여기 아저씨 집 아닌데요~"
마치 말 배우는 꼬마 대하듯 남편이 천천히 말을 건넨다.
남편의 얼굴과 목소리에 담긴 그 상냥함이 난 영 못마땅하다.
'다그쳐도 모자랄 판에...'


'여기가... 아닌가...?'
하듯 두리번거리며 머뭇거리는 그의 제스츄어가 더 속 보인다.
칫, 내가 그 속셈을 모를 줄 알고...


"여기는 #3575구요, 아저씨 댁은 저쪽 맞은 편예요~"
하며 손짓으로 방향을 가리키는 남편 말에 그는
'그랬던가?' 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그새 나이가 팍 들어버린 듯한 등 구부정한 그의 모습이 모퉁이로 사라질 때쯤에서야
우리 두 사람 문득 생각난 듯 현관문을 잠그고는 과일 가게를 향해 걷기 시작한다.


얼마쯤 걸었을까,
갑자기 남편이 "잠깐만 여기 있어봐!" 하더니 성급히 어디론가 달려간다.

영문도 모른 채 혼자 길거리에 뻘줌히 얼마를 서 있자니 얼굴에 온통 땀투성을 한 남편이 돌아왔다.


"암만해도 집 찾아가는 길을 잃으실 것 같아서.
따라가 보길 잘했지, 그 걸음으로 그새 거까지 어떻게 가셨는지 참 희한해. 하하."


남의 속도 모르고 저런다 싶어, '그 사람을 잘 아냐'고 슬쩍 물었다.
아차 하면 그때 그 '비밀'을 다 밝혀버릴 심산이다.
지금 남편이 베풀고 있는 친절은 그런 사람에겐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란 걸 알려줘야 한다.


"으응, 저 이탤리언 아저씨, 치매 환자인 걸 요즘에야 알았네 난.
종종 집이 어딘질 헷갈려 남의 집에 들어가기도 하고 그러신다지 아마."


아하... 싶으면서도,

암리 그래도 그렇지, 그때 내가 당했던 일은 치매하곤 좀 다른 성격 아닌가?

하는 말이 막 튀어나오려는데,


"교통사고로 아내와 두 아들이 다 죽고 혼자 되신 분이라더라.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길에서 방황하다 잠깐씩 들르는 간호인이 와서야 집에 들어가고.  
아는 이웃들은 아주 안타까워들 하지..." 라며 남편이 말을 잇는다.


게다가 요즘엔 정신착란 증세까지 보이셔서
아들 또래 꼬마들만 보면 집에 가자고 손을 잡아당기거나
여성들만 보면 옛날 젊었던 자기 아내인 줄 알고 달려가 부둥켜 안고 키스 세례를 퍼붓고...

그러신단다.


"혹시 자기에게도 그런 행동을 보이실 것 같으면
너무 놀라거나 과민 반응 보이진 말고 그냥 슬쩍 피하면 돼."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이내 콧등이 시큰해지며, 아까 마저 하려던 말이 쥐구멍 속으로 숨는다.
덜컥 빈집털이, 성추행 미수범쯤으로 낙인부터 찍기 바빴던 내 성급함과 부족함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오랜간 마음속에 꺼림칙하게 남아있던 그 사건,
그날 다 훌훌 날려버렸다.

 

 

 

 

 

 

 

 

 

 

 

 

 

 

 

- 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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