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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놀기

솔직한 품평

 

 

 

 

 

요 며칠 커피맛이 어째 밍밍하니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게
브랜드를 바꿨나?


아침이면 교육청의 내 워크스테이션에 들러 모닝커피 한잔을 마시고 여름방학 수업을 나가곤 하는데
며칠 전부터 커피맛이 이상하게 영 아닌 거다.


"넌 미식가가 되긴 틀린 것 같다"

란 소리를 남편에게 들을 정도로 사실 혀의 미각이 상당히 둔한 나는, 흑,
실제로 상한 음식을 멋모르고 먹거나 마시고서 캬 하, 맛나다! 는 감탄사를 내뱉는다거나,
무작정 먹었다 나중에 배탈이 나는 것으로 상한 음식였음을 깨닫게 되는 처지라서,
내 입에 흘러나오는 음식 평은  '이 세상 모든 음식이 그저 다 맛있는 사람' 의 것으로 치부되어
빵점 크레딧이 주어지는 형편이다.


암튼 그 맹맹한 커피맛을 그저 내 입맛 탓이려니 하며 하루 지나쳤다가
평소보다 유난히 일찍 도착한 이튿날 아침엔
내가 직접 만들어 보련다 하며 커피를 내렸는데... 역시 마찬가지 맛이다.

 
티 백처럼 1회 사용분 개별 포장이 돼 있어 특별히 커피 양에 신경을 쓸 일도 없고,
버튼만 누르면 일정량의 물이 자동으로 공급되는 전자동시스템이라
커피 내리는 사람에 따라 농도나 맛이 달라지고 말 게 없는 상황이긴 하다.


찍어 먹어봐도 된장인 줄 모르는 미각 빵점 나란 사람에게서 '맛없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면
남편 말마따나 "완전 부패한" 수준이어야 하는데...
암만 봐도 커피가 혀에서 맹물처럼 무미 무취로 느껴지니.


혹시나 싶어 주방 스토리지를 열어 커피 박스를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어라? 낯선 이름이다.
그간 이용해오던 브랜드 '스타벅스'나 '그랜빌 아일랜드' 가 아닌 것이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혼자 부스럭 대고 있으려니
선임 스탭 한 명이 주방으로 걸어 들어오며 궁금한 표정을 짓는다.


혹, 커피 브랜드 바뀌었어요? 하고 물으니, 글쎄 하며 왜냐고 묻는다.
커피 맛이 영 밍밍해요.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고.


그래요? 나야 커피를 안 마시는 사람이니... 하며 스토리지를 열어 보더니
어? 지금까지 우리 스타벅스꺼 먹고 있지 않았나? 하며 나와 같은 말을 한다.
커피 공급업체를 바꿨나 보다며 나더러 교육청 물품 구매 총괄 매니저에게 얘기하라는 말을 한다.


암만 다시 커피맛을 보고 또 봐도 정말 입맛에 안 들긴 하지만,
음식 평에 관한 한 행여 컴플레인을 할만한 수준이 아니란 걸 스스로 잘 알기에,
"에이, 뭐 그런 걸로 컴플레인까지요.  글구 순전히 제 개인적 선호도일 수도 있는 거라..."

쭈뼛거리며 얼버무리니,

 

"그건 컴플레인이 아닌 새제품에 대한 품평이 아닐까? 
불평이든 칭찬이든 개개인이 제품 품평을 솔직히 해줘야
담당 부서에서 올바른 제품을 구매할 수 있는 거쟎우." 하며
뭣하면 자신이 대신해 내 의견을 전해 주겠다며 매니저 방으로 향한다.


'괜히 말했나.  그깟 커피, 내 입맛에 안 맞으면 그냥 안 마시면 되는 것을...'

 

그런데 순간, 생각해보니 그게 아닌 거다.
'나 하나쯤이야'가 아닌, '나 하나라도'의 참여정신, 책임의식을 우린 학생들에게 얼마나 주지시켜오고 있던가.


"그러실 것 없어요, 수업 다녀와서 내가 직접 말할게요~"
하며 매니저 방으로 향하는 그녀를 불러세웠다.


정오가 막 지나서 수업이 끝나고 오피스로 돌아오자마자
구매총괄 매니저에게 새 커피에 대한 내 의견을 조심스럽게 전해주었다.
내 의견에 고마움을 표하며, 다른 스탭들은 어찌 생각하는지 의견을 물어야겠다 한다.

 

 

 

 

 

다음날, 오전 수업을 끝내고 돌아오니
구매담당 매니저로부터의 메모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새 커피에 대한 의견 조사 결과,
나처럼 커피광인 사람들이 교육청엔 많지 않기도 하고
(연령대 높은 선임 스탭들이 많은 곳이라 대개가 건강에 각별한 신경을 쓰는 이유의 하나로 커피를 자제하는 분위기), 
또 마신다 해도 새 커피 맛이 비교적 나쁘다고는 느껴지지 않는다거나 하여
결국 새 커피 맛에 반기를 적극 드는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는 셈이 됐다는 거다.


'나와 의견 동감하는 자 없음'으로 인해 내 미각에의 재평가, 혹은 굴욕을 만회할
절호의 기회가 사라짐에 아쉬움이 생기려는 순간,
매니저의 마지막 한 줄이 가슴에 가득 들어온다.
"기존 브랜드로 복귀 결정 만장일치 – 커피를 정말 즐기는 사람을 위하여"

 

***


'내가 아니라도' 로 안주하려는 내게 '내가 아니면'을 새삼 일깨워 주는 사람들,
단 한 명의 컴플레인에도 큰 비중을 두고 개선의 의지를 보이는 사람들.
정말 절실히 원하는 소수를 위한 다수의 소리 없는 양보.

 

아직 배울 것이 참으로 많은 나 자신을 본다.

 

 

 

 

 

 

 

 

주말 편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Sittin' on The Dock Of The Bay | Playing For Change

 

 


- 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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