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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랑교육이랑

의심

 

 

 

 

'분명히 여기 있어야 하는데...'
책장에 꽂혀있어야 할 내 노트북(공책)이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질 않는다.


다른건 몰라도 정리정돈 하나는 병적일만큼 치밀한 나이기에
정해진 자리가 아니곳에 물건을 불쑥불쑥 놔둘리 없는데다
더구나 수년간 같은 자리에 습관처럼 넣어두어 눈감고도 집어낼 수 있는 그 초록노트가
어느날 아침 새삼 제 자리를 벗어날 까닭은 더 더욱 없는거다.


'깜박 다른데에 놔 둔걸까...'
혹시 동료교사와 수다떨다 그의 탁자 위에 무심코 두고 왔나 싶어 재삼 확인해 봤지만
역시나다.


선반뒤로 넘어갔나...
다른 자료들에 파묻혔나...
혹 퇴근시 신발을 갈아신으면서 바닥에 둔채 잊은건가...
화장실에 놔뒀나...
스탭 런치룸에 두고 왔나...
확률 0.1% 를 기대하며 사방팔방 다 뒤져봐도 내 그린노트북은 나타날 기색이 없다.

 
생각해 볼 남은 가능성은 두가지다.
무심코 쓰레기통에 집어 넣었거나...
(노트북 두께도 두께려니와,  그건 아닌것 같다.)

상담을 마친 학부모나 학생의 소지품 밑에 깔려있다 쭐래쭐래 딸려 갔거나...
(그렇담 내게 연락이 와도 벌써 왔을텐데)
암만 생각해도 이 여벌가능성들은 아닌거다.


그렇다면...
그 노트에 학습에 관한 어떤 비밀스런 내용이 메모돼 있다거나, 혹은
시험에 관한 정보가 담겨있다거나 뭐 그런것 쯤으로 호기심 일천한 어느 학생의 손을 탄 걸까?
그럴리라곤 생각치 않고, 또 그렇게 생각하고도 싶지 않지만
사람이다보니 확률 제로를 장담할 순 없는 일이다.


학습에 관한 구체적 정보들은 '일일강의계획 및 기록부'란 것에 따로 기재돼 있고,
그 사라진 노트북에 적힌 것이라곤 고작해야 암호처럼 끄적여진
일상의 소소한 해프닝들일 뿐이지만
어쨌든 모르는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 더듬어진다는 것, 꺼림직한 일인거다.


"혹시 나중에라도 내 그린노트북 봤거나 실수로 가져간 학생 있으면 내 탁자위에 두고 갈 것"
이라며 학생들에게 내 마뜩잖은 기분을 은근히 내보이며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그런게 아니길 바라지만... 암래두 학생 손을 탄것 같단 생각을 지울수가 없어.' 하며
퇴근후 집에와 짝지에게 불만석인 하소연 하려다 그냥 말아버렸다.
맞아 맞아 손뼉쳐 줄리 만무한 성격의 짝지에게 오히려 '구사리'나 덤탱맞지 않으면 다행일거고,
무엇보다도 원래 잃어버린 사람 죄가 제일 크다쟎나,
무작정 이사람 저사람 의심부터 하고 볼 순 없는 일이다.

 

 

 

 

 

찜찜한 마음으로 하루를 그렇게 보낸 후 다음날 아침인 오늘 출근을 했다.
혹시나 하고 다시한번 둘러보고...
그러나 있을리가 없다.


고의로든 실수로든 내 노트북을 가져갔을 그 누군가를 향한 서운함의 시위라도 하듯
수업시간중 완성해서 제출하고 가라며
예정에도 없던 in-class 과제물을 학생들에게 불쑥 내준다.


아이들 고개가 책상위 페이퍼에 불만스럽게 파묻히고,
검토할 자료들이 생각난 나는 교실 한켠의 화일캐비넷 쪽으로 터벅터벅 향한다.


캐비넷 서랍을 열고는 하나 하나 자료를 살피며 종이폴더들을 더듬어 가는데...
아...
폴더 사이에서 영악스럽게 빠꼼히 고갤 쳐들고 있는 내 초록노트북!


그제서야 생각난다,
전날 캐비닛 열고 화일을 검토하며 노트북에 무언가들을 메모했던걸.
그러다 노트북을 그대로 둔 채 무심코 캐비넷 서랍을 닫았던게 틀림없었다.
 

그걸 모르고 애꿎은 아이들에게만 내심 의심의 눈초리를 쏘아대고 있었느니, 나도 참...
내가 내 학생들을 믿어주지 못하면 누가 믿어준다고.
콩콩 내 머리를 마음으로 아프게 쥐어 박는다.

 

 

 

 

 

 

 

몇 교시가 끝나고 휴식 종이 울리자
한 교무실 직원이 '배달왔네요~' 하면서 무언가를 들고 온다.
붉은 장미 한아름이다.
"Happy Valentine's Day! - from your secret Valentines-"


감격의 순간이 가시기도 전에 어느새 학생들이 단체로 내 오피스 앞에 와 서있다.
그러더니 갑자기 합창을 시작한다…


When I see your face,
There’s not a thing that I would change
'Cause you’re amazing
Just the way you are...

 


콧날이 시큰해진다...

 

  

 

 

 

- 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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