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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랑교육이랑

시험치는 아이들 I

 

 

 

 
 
시험 시작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여학생이 손을 번쩍 든다.
벌써 시작한거 같아요, 아직 때도 안됐는데. 약을 한 알 먹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
 

녀석, 매번 이 기간이면 수업이 불가할 정도로 초죽음이라는 걸 모르지 않기에
그래 알았다 눈짓을 보내며, 시험을 계속 칠수 있을지 어떨지는 '일단 함 두고보자'고 했다.
스트레스는 여성 생리 리듬마저 제 멋대로 당겼다 늦췄다 하는 불리다.


또 한 녀석이 몇 분 차이를 두고 나를 부른다.
갑작스런 심한 두통을 호소하며  진통제를 찾는다. 
시험 도중의 극심한 긴장이 종종 빚어내는 그리 낯설지 않은 현상이다.


진통제든 뭐든 그 어떤 복용약도 전문의를 통하지 않고는 학생들에게 줄 수 없도록 되어 있는데 이걸 어쩐다...

일단 기다려 보라 해놓고는 함께 교대 감독하는 다른 교사와 의논을 한다.
있다 해도 줄 순 없는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몰래 한 알 건네고 싶어도 있어야 말이지요...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는 녀석 얼굴을 보니 도저히 그냥 있을 수 만은 없었다.
고3 내내 쌓아올린 수고와 노력이 두통이나 생리통 때문에 망쳐지기라도 한다면...
에잇, 나중 일이야 어찌 되든! 학교 오피스로 달려가 직원에게 슬쩍 물었다, 
내게 두통이 갑자기 생겨서 그러는데 혹시 진통제 가진 것 있냐고.


넉넉히 다섯알쯤이나 받아 가지고 와선 녀석들에게 한 알씩 살그머니 건네 주었다.
고마움을 수줍게 눈빛으로 표하는 녀석들,


한달내내 시험치르는 일로 보내는 12학년(고3) 학생들에게 있어 5, 6월은 그들 지옥의 달이기도 하고
그간 투자한 노력에의 결실을 맞는 최대 중요한 달이기도 하다.
길게는 하루 7시간여 꼬박 시험장에 앉아 머리를 쥐어짜며 페이퍼와 씨름 해야 하는 그들을 보며
나도 저런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그렇게 힘들었던 시절을 그땐 어찌 헤쳐나갈 수 있었을까.


폭포를 거슬러 튀어 오르는 연어만큼이나 에너지 팔팔한 저 시기,
'힘듬 체감수위'가 우리 생각만큼 그리 처절하진 않다는 것을 고려해 50%쯤 할인해 준다해도
돌아보면 그래도 쉽지 않았던 timeline.
더이상 저들 자리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 한편 다행스럽기도 하다. 

 

 

 



 

시험을 앞두고 한 남학생의 두 학부모가 우울한 얼굴로 찾아왔었다.
제법 내로라 하는 수재들로 구성된 특정 디플로마 프로그램에 들어있는 학생들,
그 중 하나인 이 녀석 역시 그룹리더 자질을 갖춘, 그야말로 끼가 다분한 학생이다.


그 녀석이 어늘날 부터인가 우울한 모습으로 말을 안하기 시작하더니
방과후 집에 돌아오면 제 방에서 나오질 않고 저녁도 거부하곤 하기에
하루는 두 부모가 아이를 불러놓고 엄하게 이유를 다그쳤다 한다.  그런 즉,


원래 영국인인 이 이민가족은 자녀가 대학을 들어가기만 하면 아빠는 사업차 영국으로 돌아가고
엄마만 이곳 캐나다에 남아 있을 거다 라는 말을 아이에게 했던적이 있었다는데,
아이는 그말을  '부모가 나 몰래 이혼을 하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이를 앉혀놓고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정말 아빠가 순전히 사업상 이유로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라 설명을 해도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
결국 그 학생을 불러 두 부모가  '이혼 절대 아님' 이라는 선서아닌 선서를
내 앞에서 한 다음에서야 그 학생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니, 내가 무슨 바이블이라도 된다꼬?

 


 

 

 

한번은 또,  한 여학생 학부모가 긴급 상담을 요청했다.
언어지체(발음)가 있는 이 녀석은 특히 수학 분야에서 거의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
이미 미국 스탠포드로부터 Early Decision에 장학생 입학이 조건 허락된 상태이기도 하다.
조건이란 추후에 추가 제출 될 디플로마 성적이 일정 기대치에 미쳐야 한다는 것.


그런데 그런 녀석이 시험을 앞두고  심한 짝사랑 사랑앓이에 빠져 도무지 시험공부에 몰입을 못하겠다는
부끄러운 속사정을 하루는 제  엄마와 아빠를 불러 앉혀놓고 울면서 하소연 하더라는 것이다.
시험 성적이 제대로 안 나오면 자신의 스탠포드 입학도 취소가 될 것인데 이를 어쩌면 좋으냐며 울기만 하더라는 것이다.


소위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다고, 아무리 성적을 망치고 싶어도 절대 그렇게 되지는 않을 녀석이다.
그간 프로그램에서 줄곧 탑을 달리던 녀석이 불과 한달쯤 공부를 못했다고 해서
평균 이하를 받을 확률은 없을테니까.


걱정말라고, 그건 녀석이 자신의 능력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 뿐이라고,
내가 녀석을 따로 불러다 얘기를 해 보겠노라고, 학부모를 그렇게 안심을  시켰긴 하지만...

그러다가 혹시 정말 낙제하는거 아냐 녀석?


5월 시험이 시작되고 시험장에 앉은 그 녀석에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간다.
내가 자신 부모와 상담을 했다는 걸 그도 알고 있을테니 좀 멋적긴 할테다.
마주친 눈에 찡긋하며 '잘하고 있지?' 한마디 건네자 '옙' 하며 수줍게 웃는다.
'그래, 넌 준치 맞다니깐.'
 

 

 

 

미성년자와 성인의 과도기에 놓인 아이들.
육체적으론  무엇이든 거침없는 나이랄 수 있지만
가족관계, 시험, 성적, 이성, 호기심, 대학진학에의 중압감... 그 많은 것을 한꺼번에
다 소화해 내기엔 정신적, 정서적으로는 더할 수 없이 vulnerable, 아슬아슬하고 예민한 시기일수 밖에 없다.
이런 그들을 이해한다면 그들의 돌발행동을 같은 눈높이 마음으로 바라보고 대처하는 일은
생각보다 그다지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 엘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