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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랑교육이랑

군고구마와 이천불

 

 

 

 

 

 

점심을 막 마치고 빈 교실에 들어와 수업 준비를 하고 있으려니
한국인인 듯한 한 남성이 교실 뒷문을 기웃거린다.
누구 신지....?


한국서 이곳 교육구로 곧 전학 예정인 자녀를 둔 학부모로
한국말 할 줄 아는 교사를 물어 물어 왔다며 

학과 과정에 대해 정보가 필요하니 시간을 잠시 낼 수 있느냐고 묻는다.
사전 예약 없이 불쑥 찾아온데다 수업 외 시간이라야 한정돼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한 발걸음을 그냥 돌리게 하기는 좀 야멸차다 싶어 그러마고 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그가
혹 해당 학년 지난 시험지 사본들을 얻을 수 있느냐고 조심스럽게 묻는다.
자신의 아이가 이곳 수업을 잘 따라잡을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해두고 싶어서란다.


흠...
지난 시험지라 별문제 될 건 아니지만
아직 전학이 완료된 상태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모두가 똑같은 조건으로
학과를 시작한다는 공평성에서 어긋난다 싶어 잠시 고민을 하다가
담당 학과 선임자와 상의해보고 수일 내 이메일로 가부 간을 알려드리겠다고 했다.


대화를 일단락 지으며 일어서려는데, 그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이천 불...."


워낙 작은 음성으로 속삭이며 뜬금없이 '2천 불' 어쩌고 하는데,
그 말이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아 두 차례나 되물었다.


"이천 불이라구요? 그게 무슨 말씀인지...?"
"시험지 사본을 주시면 사례비로 이천 불을 선생님께 드리겠다구요."


갑자기 한 대 맞은 기분으로 머리가 띵 해왔다.
우리가 지금 시험지 불법 유출을 얘기하는 것이던가,
그리하여 그 비리 대가를 거래하는 것이던가.
그 학부모는 아마도 상황을 그런 식으로 지레짐작했던가 보다.


어떻게 반응을 해야 좋을지 황당해진 마음으로 잠시 멍하니 있으려니
"그럼 삼천불.... 드릴까요?"


고우 고우 마운튼이라고, 갈수록 태산이 바로 이 격이다.
"예? 그렇게 사례비 운운하시면 시험지 사본 드리고 싶어도 못 드립니다."


그래도 수고비는 드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혼잣말을 하며 쭈뼛쭈뼛 문을 나서는 그의 등 뒤에
다시 돈 얘기 꺼내시면 사본은 없던 일로 할 거라는 언질을 분명히 주었다.
 

사람 진의를 어떻게 보고...
괘씸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라,
학과 선임자에게 시험지 사본 문제를 상의했다.
학생측의 열의도 백분 반영되고, 지난 시험지 사본 배부에 별 문제없음을 확인하고는

그 학부모에게 오셔도 좋단 통보를 했다.


사방을 살피며 살금살금 들어서는 그의 모습이 마치 밀거래 접선자마냥 조심스럽다.
불법 아니니까 걱정하실 필요 없다는 말과 함께 사본이 담긴 봉투를 건네니
수고 많이 하셨을 텐데 이걸 이렇게 그냥 받아가도 될지...
하며 미씸쩍음 반, 미안함 반인 눈치다.


사람 하고는...정 그렇게 미안하면 다음에 오실 때 그냥 뜨건 커피나 한잔 사다 주시면 된다며
잘 가시라 등을 떼미니 허리가 꺾어져라 수차례 거듭 인사를 하고는 사라진다.


그래,
이곳 사회 분위기를 그렇게 시행착오를 거쳐 가며 배우시면 되는 거겠지...

 

 

 

 

 

그 생각이 난다.
어느 겨울엔가, 휴식 벨이 울리길 기다렸던 한 어머니께서 날 잠시 보자시며
쑥스러운 몸짓으로 내게 뭘 건네주셨다.
허름한 신문지에 쌓인 것이 손에 닿자마자 따뜻한 온도가 전해져 온다.


"군고구마예요, 드셔 봤으려나. 한국마켓에 갔다가 팔길래 생각이 나서..."


신문지를 여니 은박지에 쌓인 군고구마 두 개에서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일전에 학생 성적과 진로 문제로 상담해드린 적이 있었는데
그걸 마음에 고마움으로 두셨던 모양이다.


따뜻한 군고구마 두 개에서 흐르는 그 정성과 마음을
어찌 2천 불, 3천 불 돈과 비교할 수 있을런가.

 

**


겨울 방학을 앞둔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책상 정리를 하며 교실 창밖을 보니
어젯밤부터 내려 소복이 쌓이기 시작한 함박눈으로 온 교정이 새하얗다.
이런 날이면 눈길 운전에 겁먹는 아내를 위해
기꺼이 백마 기사를 자청하는 남편이 무척이나 고맙다...

 

 

 


 

 

 

 
 2013년 12월 20일에
- 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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