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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랑교육이랑

우리 가족이 살 곳은 어디에

 

 

 

 

 

일본인 엄마가 초등학생 어린 세 자녀를 이끌고 캐나다로 넘어와 난민신청을 했다. 
아랍인인 아버지는 가족과 함께 오지 못할 사연으로 홀로 일본에 남아 있었다.
 

남편의 독립필름 다큐 작업을 계기로 접하게 된 이 가족의 난민 사연은 우리 부부를 안타깝게 만들었고,
우린  그들 케이스를 돕기 위해 무료 법률서비스 도움 등 직접 간접으로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그 가족의 난민신청 이유로는,
2년 전 당시 일본 대지진 쓰나미 피해와 원전 방사능 누출 문제로
아이들의 건강과 삶에 대한 극심한 불안이었지만,
실상은 발붙일 곳 없는 세 아이에게 새 국적 찾아 주기가 더 간절한 내면의 이유였달까.


그들의 안타까운 사연은 이렇다.
아랍인 아빠와 일본인 엄마의 사랑으로 세 아이가 태어난 곳은 아빠의 나라인 아랍계 국가였다.
하지만 유아기를 거쳐 취학연령이 되면서 그들에게 꽂히는 '혼혈' 에 대한 눈초리와 따돌림은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
그 따돌림과 무시는 어린 자녀에게들 뿐만은 아니었다.
고뇌한 부모는 엄마 나라인 일본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보지만, 그곳이라고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순종 일본인도 아닌 것이, 순종 아랍인도 아닌 것이,
불리들 눈에 비친 그들은 그저 짜가 일본인, 짜가 아랍인일 뿐이었다.


가족은 다시 아빠나라인 중동으로 거주지를 옮기지만 역시 상황은 전보다 나을 것 없었다.
다시 일본으로, 다시 중동으로, 이렇게 두 나라 사이 오가기를 수차례,
그러다 보니 일본어든, 아랍어든 세 아이가 모국어처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언어가 하나도 없었다.
불완전한 언어 구사력에서 오는 문제 또한 급우들 사이에서 '이방인'이란 손가락질을 더욱 부추기는 빌미가 되었음이다.


두 문화 사이에서 오는 극심한 혼선과 정체성으로 인한 불링을 당하며
아이들은 학교 가는 일이, 동급 또래를 대면하는 일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자존감, 자신감은 바닥에 점점 떨어져 학교 가기를 거부하고,
"엄마, 난 누구야?"
"아빠, 내 나라는 어디야?"

라며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아이들은 갖기 시작한다.


이러다간 아이들을 모두 국적불명의 고아로 전락시키기 일보 직전이었다.
뭔가를 필사적으로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부부는
난민에 대해 우호적인 나라, 인도주의를 표방하는 나라, 캐나다행을 결심한다.
여자는 아이 셋을 데리고 캐나다로 넘어와 난민신청을 하고,
남자는 상황이 어긋나 어쩔 수 없이 일본에 혼자 남는다.
혼자 떨어져 아내와 아이들에의 그리움을 참아내며 그래도 굳건할 수 있던 것은
머지않아 누리게 될 자녀들의 손가락질 받지 않는 행복한 미래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민국 심사가 진행되는 동안 가족들은 캐나다 정부로부터 재정과 공교육 지원을 받으며 일 년여를 보낸다.
태어나서 정말 처음으로 느껴보는 정체성에 대한 자유.
"여기 캐나다 너무 좋아요, 친구들도 너무 다정해요.
우리 여기서 엄마랑 아빠랑 오래오래 살 수는 없는 건가요?"
아이들의 기쁨에는 또다시 어디론가 떠나야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저 아랍어로만 할래요. 일본어는 단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으니까."
아이들 엄마는 자신이 일본인임이 수치스러운, 더 이상 일본인 이기를 거부한 여성이었다.
자신의 조국과 자신의 사람들에게서 당한 배반의 깊은 상처였던 것이다.


일본인 통역조차도 거절하는 그녀의 의지대로 모든 절차는 아랍인 통역과 그녀의 손짓 발짓 영어로 이뤄졌다.
그새 아이들의 구사 언어엔 '영어'가 하나 덧붙여져, 집에서의 대화라는 게 영어와 아랍어와 일본어,
이렇게 세 언어가 중구난방으로 섞여진 웃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분명히 받아줄 거야...
그들 사연을 아는 모든 이의 격려만큼이나 기대와 희망 부풀었던 일 년쯤이 지나고
이민국으로부터 드디어 뭔가가 날라왔다.
결과는 난민 신청 거부였다.


그들의 표면적 난민 사유였던 쓰나미 피해와 원자력 누출 문제는
캐나다의 Refugee Board 에서 정한 협약난민 (convention refugee) 으로 인정되는
"인종, 종교, 정치적 견해, 국적, 성 정체성으로 인한 차별과 학대"에는 해당 사항 없는 케이스였던 것이다.


좌절하고만 있을 시간이 없었다.
우린 그 가족에게 그들의 난민신청 내면의 이유인 혼혈의 차별대우와 고통을 H&C 에 어필할 것을 권유했다.
H & C 는  Humanitarian and Compassion 의 약자로서,
연민적 사유를 근거로 하여 순전히 인정.인도주의에 호소하는 것인데,
협약 난민 사유에 해당하지 않아 난민 신청이 거절됐을 경우 시도하는 마지막 기회이다.
이것이 거절되면 더의 기회는 없는 셈이다.

 

 

 


참고로,
H&C 신청에는 크게 두 가지 주요 이유인 '고난(hardship)'과 '위험(risk)'이 그 배경이어야 하며,
당사자가 캐나다에서 자국으로 강제 출국조치 될 경우, 심각한 문제나 고통이 유발됨은 물론,
학대와 고문, 또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거나,
잔인하고 이례적인 형벌에 직면할 수도 있는 심각한 상황임을 신청인은 입증해야 한다.


또한 어린 자녀(Children)를 동반했을 경우, 아이들은 H&C 신청시 주요 고려대상이 된다.
그 아이들이 캐나다에 남는 것과 부모를 따라 자국으로 돌아가는 것 중
어떤 쪽이 아이를 위해 최선일까를 최대한 고려하여 서류 심사가 되는 것이다.


이 가족이 건 마지막 희망이 바로 'Children' 이었다.
우린 그들을 위해 전문변호사를 부랴부랴 고용했다.
남편은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 일일이 찾아다니며 담당 교사와 카운슬러들에게 아이들을 위한 '의견서'를 청했고,
그들은 하나같이 너무나 고맙게 정성을 다해 편지를 써 주었다.


그렇게 해서 도움이 될만한 자료와 서류들은 모두 준비해 H&C 에 제출했다.
될 거야, 이 정도로 절박한 가족인데 설마 인도주의 선봉국가인 캐나다에서 나 몰라라 하려고?
이번만은 거절당하지 않으리란 확신이 모두에게 99.9%쯤 있었다.


그런데... 일이 꼬였다.
그간 수정 작업 중이던 이민/난민법이 하필 그때 완료 발효될 게 무언가.
수정된 법은 H&C 에 어필할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이다.


이민국에서 날라온 '출국통지서'에는 바로 일주일 뒤인 몇 날 몇 시에 캐나다 땅을 떠나라는
출국 날짜 찍힌 비행기 티켓까지 함께 들어 있었다.
H&C 에 제출한 서류심사도 채 받지 못한 채 그들은 캐나다 땅을 당장 떠나야 했다.


공항에서의 작별을 눈물 바다로 만들며 그렇게 그들은 일본땅으로 되돌아갔다.
힘들어도 어떻게든 살아지겠지...
그리고 6개월 쯤이 흐른 어느 날, H&C 에서 변호사를 통해 우리 부부 앞으로 통보가 날라왔다. 
낭보였다. 그들 난민청원이 마침내 허락됐다는 것이다!


그 가족이 캐나다 땅을 떠난 후에도 남편이
H&C 에 제출된 서류의 심사만은 끝까지 진행돼야 한다면서 동분서주해 왔단 걸 모르진 않았지만
실제로 그 결실이 이렇게 맺어지리라곤 생각지 못했었다.
낭보를 가운데 둔 그들과 우리 사이엔 작은 흐느낌만 수화기를 타고 흐를 뿐이었다.

 

 

 

 


마지막 서류 절차만을 앞두고 이곳 캐나다 땅에 다시 발 디딜 날만을 하루하루 손꼽고 있는 그 부부는
혹 뭔가 착오가 있었다며 갑자기 취소 되는 건 아니겠죠? 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재확인에 확인을 거듭한다.


일본인도 아닌, 아랍인도 아닌, 케네디언으로서 이제 행복하고 자유로울 일만 남은 아이들,
수화기 저편에서 들리던 그들의 환호성이 아직도 귓가에 웅웅거리며,
우리 부부가 특히나 못내 애달파 하던 세 아이 중 가장 막내인 꼬마공주님이 떠오른다.
남편을 볼때마다 마치 자신의 아빠인양 목을 꼭 껴안으며 남편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던 그 모습,
일 년 넘게 떠나있던 자신의 '딸 바보' 아빠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 때문이었으리라.

 

 

 


- 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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