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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얘기저얘기

대박 날 새해 포부

 

 

 

 

새해가 시작되고도 일주일이 지나고 있던 어제저녁,
심각한 표정으로 할 말이 있다며 아내를 앞에 앉혀 놓더니
남편이 신년계획을 거창하게 선포한다.


"우리 이제부턴 돈 생각하지 말고 여행 많이 다니자!"


그러고 보니 우리 부부가 남들처럼 여행다운 여행을 가 본지가 언젠지도 모른다,
방학이 끝나고 등교 첫날이면 주고받는 동료들과의 새해 인사,
겨울이면 호와이를 옆집 다니듯 다녀오는 동료들의 까무잡잡 태닝 된 얼굴을 보면
나도 모르게 기가 슬그머니 죽어 본인 역시 바빴노라 체를 해보지만
마음 한켠이 허전해 옴은 어쩌지 못하곤 했다.


나야 좋치이~ 근데 뜬금없이 웬 여행이래?


사실 남편이 공들여 제작했던 independent film (독립영화) 이 방송국과의 계약 차질로 인해
우리 부부 파산선고 직전까지 갔던 게 벌써 수년 전 일이다.
버는 돈은 생기는 대로 은행 부채를 갚는데 흔적없이 들어가고,
가족과 지인 잔치에 깍두기 프리로더가 되기도 부지기수,
북미인에게 그저 만만한 아랫나라 멕시코 여행조차 그림의 떡이었다.
나는 나대로, 그는 그대로
이 세상 고뇌를 각자 짊어지고 깊은 절망과 고독 속으로 침몰했던 우리였다.


다행이랄까, 수년 노력 끝에 이제 은행빚도 다 갚아가고
남편의 일도 더불어 술술 누에고치 풀리듯 순조로운 요즘이니
쌓아놓고 즐길 여유까지는 아직 아니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 잘 나가길 욕심부리겠는가.
그런데도 우리 부부는 훨훨 날기를 포기해버린 닭처럼
'잘 노는' 가락을 아예 잊어버린 채 여전히 한 톨 마음의 여유 없이 지내고 있던 거다.

 

 

 


그랬는데 어제 불쑥 남편이 여행 선언을 한 것이다.
이제부턴 여건과 상황 따지지 말고 무조건 가자는 것이다.
여행도 공부처럼 때가 있다던데...하던 아내의 푸념에
걱정 마, 나중에 할미 되문 내가 업구서라도 여행 실컷 다녀줄 테니까...
하며 아내를 달래던 사람이 아니던가.
 

것도 "일 년에 4번씩"이라는 구체적 여행 횟수까지 정한다.
단 한 번씩이라도 난 족하거든, 이란 내 말에,
해보지도 않고 숫자부터 깎을 생각은 말자는 그의 일침이다.


그리고는 신년계획 또 하나를 더한다.
"저녁 식사 때는 티비와 컴퓨터, 휴대폰을 일체 끄고 음악만 감상하며 도란도란 식사하기."


흠마나...


하기야, 식사 때면 각각 휴대폰을 들고 나란히 티비 앞에 앉아서는
"맛있어?"
"응, 맛있어."
음식이 입으로 드가는지 코로 드가는지 모를 텍스팅 버전의 몰-인간적 식사를 해온 게 얼마던가.


언제부터 시작할 껀데?
응, 낼부터.


여행을 몇 번쯤이나 가게 될지, 
식탁에 음악이 흐르는 로맨틱 식사를 며칠이나 하게 될지,
하지만 계획 그 자체만으로도 벌써 행복한 기분이다.
올 한해는 무언가 희망찬 기운으로 가득할 것만 같지 않나,
비록 작심삼일로 끝나게 되더라도 말이다.

 

 

 

 

 

 

 

 

 

 

 

- 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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