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혼자놀기

정리 (情離)

 

 

 

 

 

 

 

분주했던 지난 몇 개월,
남편의 스튜디오 공간에 초점을 맞춘 대형 프라젝트 새집 이사도 드디어 마쳤다.


피유... 옮겨놓은 이삿짐 박스가 방마다 만리장성,
제비 박씨도 아닌 것을 우리 부부 그간 참 많이도 물어다 놨구나 싶다.
모든 물건이 제 있을 곳을 완벽하게 찾아 들어가기까진 아직 더 시간이 필요하지만,
쉬엄쉬엄할 성격은 또 아닌 나라 며칠 휴가까지 동원해 올인하고 나니
이제 어느 정도 집 모양새가 잡히기 시작한다.


연이틀 총동원된 남편의 건장한 지기들이 아니었으면 어림도 없을 이사였다.
하다못해 점심 샌위치라도 쏘겠다는 우리 제안에 "What are friends for~" 하며 손사래 치는 지기들,
부부 이름으로 고마움 담긴 Thank You 노트를 하나하나에게 메신저로 띄웠다.
정리되는 대로 조촐한 저녁 한 끼라도 집에서 대접해야지.


잠시 짬 난 마음으로 실로 수 주만에 내 블러그도 열어본다.
그런데 이런! 조블이 문 닫는다는 비보다.
금방이라도 막 내릴 듯 불안정한 그곳 서버가 더는 미덥지 못해
몇 년 전 그곳을 떠나오면서 줄곧 예측했던 작금의 상황이긴 하지만,
통신원으로 시작된 내 친정이나 다름없는 곳인지라 막상 문을 닫는다니 마음 싸아타.
그래도 생각보단 의외로 오래 버텨준 조선이다,
아무래도 원년맴버들의 일편단심에 대한 사측 배려가 크게 작용한 게 아니었겠나.


집이든 블러그든 '쌓인 정을 떼고, 정을 새로 붙이는 일'이 어디 post-it처럼 그리 간단턴가.
가상공간 인연 쌓고 허물기가 레고블럭 같아,
그런 공간에 자신의 일상과 영혼을 볼모로 잡히는 버츄얼 우는 절대 범치 않으리라 자신하지만
결국 '정'이란 놈은 내 의지를 교묘히 피해 마음 어딘가에 어느새 속속 숨어들어 버린다.

 

 

 

 


티비도 식탁도 없이 플로어 바닥에 신문지 깔고 식사하면서도 마냥 행복했던 우리 신혼 때를 생각하며,
두 식구 생활필수품 아닌 것은 미련없이 다 버리고
새털처럼 가볍게 이삿짐을 꾸리자던 우리 부부 의미심장한 초심 다지기가 무색하게도
새 둥지에 옮겨진 세간은 여전히 과하고도 과했다.
켠 켠 이 쌓여있는 우리 부부의 신혼 적 보드게임과 놀이 기구들.
"누가 보면 우리 집에 아이가 네댓은 되는 줄 알겠어."


많이들 그렇겠지만 그 놈의 emotional value가 항상 난제다.
쓸 수도 버릴 수도 없는 딜레마를 떠 안기며 낡은 모습으로 공간을 대따 차지하는 물건들.
게중엔 침 한번 꼴닥 삼키고 과감히 해치울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시아버지 손때가 묻은 유품이라던가
싱글 종지부를 찍으며 올케인 내게 오랜 간직을 부탁한 두 시누이의 소녀적 추억들처럼
버리기 zero tolerance 를 적용할 수 없는 priceless인 게 더 많다.


'버려도 좋을' 대상에의 관점 차이 또한 우리 부부의 못 버리기 수위를 높인다.
남편의 엔틱컬렉션인 백 살도 더 됐을 법한 축음기와 수백 장의 vinyl record가 영 못마땅한 아내,  
꽤 값나가는 여분의 양탄자들을 더는 깔 데가 마땅쟎단 이유로 다 줘 버리자는 남편.
결국 둘 마음 절충하고 달래가며 친구와 지인들에게 나눠 줄 것 다 나눠주고
그래도 남은, 버리긴 너무 아깝고 도네이션으론 부적합한 물건들은
날 잡아 야드세일 하기로 우리 부부 의견 일치를 본다.
어디 그깟 돈 몇 푼 챙기재서겠나.

 

 

 

 

 

이사를 하면서 '과감히' 버리고 온 물건 중엔
내 키 1.5배쯤 족히 되는, 분홍 유리장미 만발한 플로어 램프 한 쌍이 있다.
그 눈부신 아름다움을 어느 무빙세일에서 접하는 순간 얼마나 내 가슴 뛰었던가.
이후로 오랜 세월 거실 양켠을 탐스럽게 빛내느라 빛바래고 깨지며 사정없이 낡아 온 그들,
고개를 가로젓는 남편의 단호한 모습에서 그들과의 이별을 직감한다.
정리(情離).
'정을 떼는 일'은 대상이 무엇이든 항상 서글프지만
서로 최선을 다한 후회없는 작별은 때론 멋진 만남보다 더 쿨하지 않을는지.


내 마음의 분홍유리장미 조선일보, 수고하셨다.
내 징했던 첫 정, 그곳에서의 지난 시간, 그리고 인연들, 
오래 기억하리라.

 

 

 

 

- 엘리 -

'혼자놀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리(Siri)와 루바  (0) 2016.05.30
She  (2) 2015.11.28
아내의 행방불명  (0) 2015.04.04
작은 만족 큰 행복  (0) 2014.12.08
철 든 여자  (0) 2014.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