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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놀기

시어머니와의 동거 - 오, 냉장고!





부엌살림이 아무리 주부코스프레 수준인 나라 하더라도
주방 하나를 두 주부가 나눠쓴다는 것이
마치 한 주방나라에 두 여왕이 통치하는 것 같은 스트레스일 줄이야.


왼쪽 칸은 우리 꺼~ 오른쪽 칸은 엄뉘 꺼~!


초등생 책상 금긋기 놀이하듯
냉장고와 냉동고를 '동과 서' 세로로 딱! 반 나눠,
각각 알아서 식품 구입.관리 및 생명유지를 하기로 한 것까진 좋았는데,


외식 아니면 frozen ready meals가 대부분이라
인원수가 두 배임에도 냉장공간이 널널한 우리부부완 달리,
요리를 잘하고 즐기는 데다 지인 초대가 잦은 시어머니인지라
그녀의 동쪽나라는 항상 폭발 일보 직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엄니, 필요하시면 우리 공간도 쓰세요~'
라며 인심을 섣불리 턱 쓸 상황은 또 아닌 것이
어쩌다 동과 서가 동시에 대규모 장을 본 날에는
그야말로 코끼리 한 마리를 집어넣느라 냉장고 뒤집기를 해야 하는
난리블루스가 연출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쪽의 공간 여유에도 불구하고 불편함은 있었다.
가짓수 많은 나의 그린스무디 재료들 때문인데,
매일 1리터씩 만들어 먹는 그것이다 보니
humidity drawer (채소/과일칸) 이 항상 공간 부족인 거다.


어느 날, 고개 돌려 염탐한 옆 나라,
텅텅 비다시피한 그녀의 채소칸!


아, 이웃 홈 스윗홈에 알 낳는 비겁한 뻐꾸기이어도 좋다, 
나의 채.과들이 이 짓눌린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울수만 있다면.


내 쪽의 과일과 채소를 그녀의 채소칸에 단체 업둥이 보낸 지 며칠,
그녀로부터 아무 반응이 없는 걸 보면
역시 소탈한 성격답게 그러려니 하셨거나,
아님 그제까지 눈치를 못 채셨거나다.
란 단정이 들 즈음 어느 날, 냉장고를 열자 내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함께 섞여 서랍들에 채워져 있던 모든 과일.채소들이
female-only dorm vs male-only dorm  여기숙사 대 남기숙사처럼
각각 다른 칸에 구분 격리된 것까진 좋았는데,
과일칸들은 마치 거시기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듯 미어터지기 일보 직전인 반면
채소칸들은 이전처럼 공간이 널널하다 못해 썰렁하기까지 한 거다.


일부 과일 채소가 익어가면서 내뿜는 에썰린(ethylene) 이란 개스가
그에 민감한 다른 것들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개체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과일류와 야채류는 함께
섞어 보관하지 않는 게 좋다는 걸 얼핏은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이것 따로 저것 따로 보관할 만큼 공간이 여유치 않다.






어필을 할까 하다
바쁜 그녀의 일상 스케줄 틈새를 잡지 못한 핑계도 있었지만
그녀의 '비효율적' 아이디어를 바로잡기라도 하려는 내 건방진 무의식이었을까,
임의대로 과일과 채소들을 다시 섞어 두 칸에 적당히 채워 넣었다.


하지만 그들은 며칠 후,
급기야 상황을 감 잡고 만 그녀에 의해 다시 '헤쳐'가 되고,
다시 또 내 손에 의해 '모여'가 된다.


냉장고 하나를 더 들여놓으면 문제 될 것도 없겠지만,
사실 시어머니댁에 들어오면서 추가 냉동고를 이미 사 들여온 상태라
공간도 공간이지만, 임시로 있자고 시작한 동거생활에
필요할 때마다 대형 가전제품들을 추가 구입할 수도 없거니와
또 그리하고픈 생각도 없었다.


이후로도 한동안 지속된 그녀의 분리주의와 나의 합리주의 충돌은
결국 그녀가 자신의 모든 과일을 응접실 대형 과일바구니에 자진 이주시키고
냉장고 과일칸을 내게 송두리째 내어주심으로써
내 쪽에 죄스런 승리 깃발을 안겨 주었다.






시퍼런 바나나나 쌉싸름 사과 같은 덜 익은 과일을 좋아하는 나인지라
실내온도에서 급 숙성돼 금방 푸석푸석해져 가는 그녀의 것들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편할 리 또 없다.


내가 제안을 한다.
"엄니, 같은 과일들인데 우리 각각 사지 말고,
과일 샤핑을 한번은 우리가, 그 담번은 엄니가, 글케 해 함께 먹는 게 어떨까요?"


내 제안은 세 사람 만장일치로, 흐흐, 패스됐고,
그녀가 깜박하고 예정 없이 봐 온 과일장으로 인해 과일 홍수 이루는 날을 빼곤,
또 인원수로나 먹성으로나 그녀의 밑지는 장사인 것이 쪼매 죄송함을 제외하곤,
우리의 과일칸 문제는 그런대로 일단락됐다.


그러나 두 동거 초보의 냉장고 불협화음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 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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