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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놀기

파피 러브, 풋사랑의 추억

 

 

 

 

  

그 아이의 체취는 뭐랄까... 지금도 그 향을 기억할 수 있을만큼 무척 독특했던것 같다.
오늘밤  울 집에서 밤샘 공부하자, 던 그 말에 내 가슴이 얼마나 떨리곤 했던지.
짝사랑 누군가와의 데이트에서 살짝 기습키스 당할 준비라도 하는 기분으로
뽀득뽀득  한 세번쯤 하던 양치질과 세수.

 

"엄마, 나 정아네 집에 밤샘 공부하러 갈라는데.."
"뭔 공부를 밤까지 새면서 한다니?"
"응, 시험이 있거덩요..."

 

인터컴으로 대문이 툭 열리면 현관까지 한 오십 발자국쯤 걸어야 했고
현관문  열고 들어서면 넓디 넓은 눈부신 거실, 그 거실을  가로질러
3층 그 아이방까지 또 십 수 계단쯤 올라갔던 것 같다.
아이네는 부자였다,  그 당시 울집보다 한 세배쯤... 아니, 사실은 열배쯤.

 

솜털 구름에 발을 올려놓은 느낌이 그런 걸까,
그 아이 방에 처음 들어선 순간 발아래 느껴졌던 카펫 감촉이 그랬던 것 같다.
뻣뻣하기만한 내구성 강한 카펫이 아닌 진짜 양털 카펫였을 거다.

 

멋진 여류 성악가의 포부를 키우던 그 아인 노래뿐만 아니라 공부도 참 잘했고. 
남자애처럼 성격도 화끈하고 유쾌해 급우들 사이에서도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항상 인기를 독차지했다.

 

'그래도 난 정아랑 밤까정 여러번 세운 특별한 사이니까 뭐...'

 

그리곤 맬맬 일기장에 쌓아놓는 가슴앓이 바보 타령.
'난 널 넘 좋아해.... 네가 다른 친구랑 친한거 난 싫어...
이런 내 맘도 몰라주는 넌 바부야...바부...바부...바부...'

 

 

  
혼자만의 사랑고백이 가득담긴 이 비밀스런 일기장을
집에서 혹여 어무이가 보시게 될까봐 책가방에 몰래 넣고 다녔더랬는데,
그러다 어느날, 어머니낫 그 일기장이 그 아이 손에 들어가게 된거다.

 

'책을 사이에 두고 얼굴 맞댄 너로부터 진한 너만의 체취가 흘러나오면
내 가슴은 정신없이 방망이질 치기 시작해...
그러다 너와 입술이 맞닿는 상상을 난 하고야 말고...'

 

아흐... 이런 가슴 벌렁거리는 끔찍한 독백을 그 아이가 읽어내렸을 걸 생각하니
우연히라도 내 마음 알아주었으면... 했던 그간의 마음은 순식간에 간데 없다.
"넌 왜 남의 물건을 함부로 만지구 그래!" 며 벌컥 화를 내는 내게,

 

"너... 나.... 좋아하니...  여자친구가 아닌 남자로...?"
...................

 

 

아무대답 못한채 벌개진 얼굴로 고개만 숙이는 걸로 그 짝사랑 들통 사건은 일단락 됐고,
이후로도 그 아이에게선 조금도 달라진 태도를 느낄 수 없었다.
아니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여전히 그 아이 집에서의 우리 밤샘공부는 종종 이어졌다.
책상에 엎드려 잠든 그 아이 모습을 밤새 뜬 눈으로 가슴 두근거리며 바라보던 내 모습도 여전했고,
그 다음날 아침이면, 당시 외국 어디쯤 영화배우였을지도 모를만큼 굉장히 예뻤던,
그래서 학부모 일일교사 시간에 모습이라도 드러낼라치면 그 미모에 모든 학생들이 탄성을 지르던
그 아이 어무이의 우리를 위한 상냥한 아침상 준비도 여전했다. 

 

"아휴, 네가 입은 치마 참 이쁘다, 감도 고급스럽구.  엄마가 사주신거니?"
그럴때면 당시 아부지 회사 모델언냐들의 길쭉한 멋진옷들이  엄마손에 의해 사정없이 미니어처로
볼품없이 싹뚝 줄여진 후에야 내차지가 되곤 했던것에 대한 그때의 불만들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한껏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가서 읽어보라며 아이는 내게 작게 접어진 쪽지 한장을 건네준다.
휴식시간 벨이 울리기 무섭게 화장실로 달려가 쪽지를 펴보니,
'나도 너 참 좋아해... 하지만 우린 둘 다 여자라서 연인사이가 될 수 없는 거 너두 알쟎아.
글구.. 우리 가족...  미국으로 이민가게 됐어...'

 

그 후 얼마 안 있어 그 아이는 가족을 따라 미국으로 떠나버렸고,
마치 정해진 수순인양 곧이어 나도 부모님따라 캐나다로 떠나와 버림으로서
우리들의 풋사랑, 아니 나만의 우끼는 짝사랑은 김빠진 맥주처럼 시금털털한 종지부를 찍었다.

(두근두근 먼일이라도 크게 기대하셨던 독자들껜 심심한 사과를 하나씩 나눠드리며..)

 


 

 

아이의 성은 '서' 씨 였다.
그래서 그런지 난  지금도 '서' 씨 사람이면 나도 모르게  일단 호감부터 갖는 경향이 있다.
뿐인가,  혈액형  'A' 라면 무조건 A+ 를 주고 싶으니.
여기 혹시 '서'씨 성에 혈액형 A 인분 계세요~? ㅎㅎ

 

 

 

짝지에게 언젠가 그 아이 얘기를 해주면서,
"여자인 걔한테 그때 어케 그런 감정이 생겼는지 지금 생각해도 내가 넘 우껴.

그런데 있쟎아, 난 가만보문 남성적 터프함이 느껴지는 여자를 보면 왠지 멋지당 싶은거 있지, 큭큭" 했더니
내게 그런 성향이 있었는지 꿈에도 몰랐다며 키득키득 놀린다.

 

"만약에 네가 게이라 가정하고, 사귀고픈 여성 연예인 꼽으라면 누굴 꼽고 싶어?"
"좋아하는 배우 그런거면 몰라도 사귀고 싶다거나 그런 동성연예인은 당연히 엄찌 바부야."
"아니, 만약에 말야."
"글쎄... 꼭 꼽으라면... maybe 엘렌 드 제너러스 스타일?"

(헐리웃 만능엔터테이너 Ellen DeGeneres 는 동성아내를 둔 유명한 레즈비언)

 

그 다음부터 티비서 엘렌만 보이면 짝지는

"울 쟉 이상형 남자 저기 나왔다아~" 이럼서 놀린다. 
차암 내. 하하.


 

 


- 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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