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랑교육이랑

난 금발의 여자란 말예요

 

 

 

 

 

 

녀석이 교실 문 밖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금발로 염색된 퍽퍽한 긴 머리, 여드름 피부위에 덕지덕지 발라진 화운데이션과 핑크빛 도는 입술,
종아리 알통이 드러나는 원피스...  
 

"그렇쟎아도 널 좀 보자고 할 참였는데 마침 잘 와 줬다."
아이 손을 이끌고 상담실로 향했다.


"그새 얼굴이 헬쓱해진것두 같구, 피부가 우둘툴한 게 그거 혹시 화장 부작용은 아니냐?"
"요즘 스트레스 받아서 그런걸 거예요."
"지금 11학년 (고2)니까 점점 부담스러워지는 건 너 뿐만은 아니쟎겠어."
"그게 아니구..."
"근데 화장은 조금 덜 진하게 했음 더 이쁘겠다, 피부 츄러블도 덜 드러날테고."
"......"


녀석은 교내에서 잘 알려진 게이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여성이길  더없이 열망하는,
자칭 '슬픈 운명을 점지받은' 생물학적 남성이다. 그리고 한국태생이다.


졸업을 한해 앞둔 그의 학점 부족도 그렇고, 학습태도(work habit) 등 몇몇 문제가 지적돼
혹시 같은 모국어로 통하는 속사정이라도 있을까 싶어 내게 특별 상담의뢰가 막 들어온 참이었다.
녀석이 말하는 스트레스가 대충 어떤류일 거라는 짐작이 안가는 바는 아녔지만 어쨌든 함 들어보기로 했다.


자신을 따돌리는 듯한 급우들의 눈길이 싫다는 거다.
교사들이 복도에서 마주쳐 지나며 보내는 자길 향한  미소띈 시선도 왠지 거슬리고,
수업 그룹워킹시간에 급우로부터 받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취급은 곤혹스럽기 짝이 없단다.
그러다보니 점심시간이면 혼자 캠퍼스를 빠져 나와 학교 근방의 홈스테이로 가 식사를 하고 오고
학교 특별활동시간에도 참여의욕이 없다.  성적도 F를 겨우 면하는 정도다.
부모도 가족도 가까이 없고, 단 한명의 단짝 친구도 없으니 외롭지 않을수가 없다.


남의 시선이 그리 신경쓰인다면, 머리와 복장이야 그렇다치고 화장을 꼭 그렇게 진하게 해야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기의 독특한 모습으로 인해 사람들 시선을 받는게 좋단다. 
한편 그런 주목 집중이 짜릿하면서도, 혹 뒤에서 흉이라도 보는가 싶은 자격지심으로 그게 또 불안하다.
타인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면 보이는대로, 무관심하면 무관심한대로
나름대로의 이유를 억지 짜맞춰 부정적으로 만들어 버리는거다.
이래도 싫고 저래도 싫은 자기 마음 자기도 잘 모르겠으니 어찌 스트레스가 아니랴.

 

 

 

 

사실 한해만 있으면 12학년 졸업반인데, 본인 나름의 스트레스는 둘째치고
졸업에 필요한 학점이 점점 뒤쳐져가는 상태고 보니 저러다간 졸업도 못하게 될 것이 여간 심각한 상황이 아니다.


학교 입장에선 학생이 자신의 학업에 충실하고 학업성취도나 학과활동이 좋으면
그 학생의 복장이나 행동에 대해선 크게 문제삼지 않는 편이다,  
개성 존중 차원일수도 있고,  남이야  전봇대로 이를 쑤시던 말던 상관치 않는 지극히 개인주의문화적 발상일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학생의 학업성취도, 즉 성적이나 학과활동에 문제가 생길 경우이다.
이들이 좋지 않을 경우엔 평소에 문제삼아 지지 않던 그 학생의 복장마져도 이슈가 되어
눈덩이처럼 사안이 커지기도 하는데,  이 학생의 경우가 바로 그것.


졸업까지 앞으로 남은기간 동안 학점관리와 학습태도에 더 신중을 기할 것과 좀 더 긍정적 사고전환으로

밝은 마음을 갖기로 약속받은 후 녀석을 보냈다.


그랬는데...  녀석이 일을 또 틀어지게 만들고야 만다.
부모가  사업상 미국에 있는 관계로, 교육청이 지정해준 홈스테이에 머무르고 있던 녀석은
그곳이 맘에 안찬다며 다른 홈스테이를 직접 찿아보겠다며 나서더니
길거리 지나던 맘씨좋게 보이는 행인 한 사람을 제맘대로 찍어 무대뽀로 졸졸 따라가
자기 홈스테이 하게 해달라며 옷자락 붙들고 막무가내 조른것이다. 
놀란 그 사람은 교육청에 신고를 하게 되고.


결국 학교 행정부에선 이 일을 부모와의 긴급 상담이 요해지는 중요사안으로 판단했고,
그리하여 미국에 있던 부모 중 아무라도 한사람 당장 와 주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몇차례의 장거리 통화 끝에 마침내 학생 모친이 바쁜 사업을 일단 접고 부랴부랴 날라왔다.


어느 부모가 자신 자식을 최고라 하지 않으랴만,
그 아이 역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말 소중하디 소중한 그분의 자식인 건 분명했다.
지금은 떨어져 사는 폭력 부친 밑에서 마음고생하며 혼자 커 오다시피한 불쌍한 자식이라고,
자라면서 그간 한번도 스스로를 남자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며  정말 여자가 되게 해달라는
아들녀석의 눈물어린 간청을 몰라라 할 수가 없어 이젠 딸래미로 인정을 하고
성전환수술까지 고려하고 있다는 모친의 말이다.


외롭고 길 잃은 아이에게 정신적으로 든든한 위안이 되어 주는 것이  현재 부모로써 해 줄 수 있는
가장 급선무이기에 최소한 아이가 졸업할때까지는 곁에 꼭 있어주겠다는 모친의 굳은 약속과 함께
학생 당사자 또한 어떻게 해서든 졸업만은 할 수 있도록 빠진 학점을 보충하고
복장과 화장도 조금 톤을 낮추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을 우리에게 줌으로서
하마터면 더 심각해질 뻔 했던 사안이 그쯤에서 일단락 지어졌다.

 

 


 

그  이듬해. 12학년 막바지 졸업을 앞두고 있을 녀석의 그간 진척상황이 문득 궁금했다.
자료를 찾아 들여다 보니 졸업에 필요한 필수학점은 여전히 부족한 상태고
지각에 무단 결석 등 출석상황도 엉망인 것이, 졸업을 포기한게 아니라면 그럴 순 없는 일이었다.


녀석에게 살짝 이메일을 띄웠다, 방과후에 들렀다 가라고.
그런데 며칠을 기다려도 답이 없다.  녀석 쎌펀을 시도 해봐도 받지 않고, 홈룸교사(담임) 를 통해 전갈을 주어도 묵묵부답이다.
나를 피하는게 틀림없었다.


그러던 며칠 후, 학교 교문으로 막 들어서는 녀석과 우연히 딱 부딛혔다.
날 쳐다보는 얼굴에 죄책감이 역력하다.  녀석 손목을 이끌고 나무그늘 밴치로 가 앉았다.
너, 나 왜 피하냐?
피하려던건 아니구요...


아니나 다를까, 졸업은 스스로 포기한 상태, 아니 졸업을 못해도 괜찮다고
학년담당 VP (교감) 에게 이미 선포한 상태라는 어느정도 예측했던 대답이 흘러나왔다.
자신을 위해 하던일 중단하고 일부러 날라온 모친과도 소위 심한 '사랑의 잔소리' 로 인한 허구헌날의 다툼끝에

사이가 아주 나빠져 결국 모친이 팽 미국으로 돌아가버린 모양이다.


그럼 앞으로 구체적인 계획이라도 있는거냐?
남은 학기만 채우고 나면 바로 토론토쪽으로 갈 생각이란다,
거기서 팟타임 좝으로 돈을 벌며 헤어 & 메이컵 코스를 밟아 유명 헤어스타일리스트가 될 계획이란 거다.


그래, 졸업이란게 꼭 정해진 학년과 연도에 해야만 한다는 법은 없다.
나이에 관계없이 마음만 먹으면 자신의 학력과 크레딧을 언제든지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무진장한 기회가 있는 나라가 이곳이니까. 


어느 날 원하는 것이 손 닿을 듯 가까이에 와 있는 순간,
아, 이래서 졸업장이, 이만큼의 학력이, 지식이 필요한 거였구나... 하며 그때서야 깨닫게 되는 순간이 언젠가는 있겠지.
철이 하나씩 든다는게 바로 그게 아니겠는가. 그때 새로운 각오로 다시 시작해도 결코 늦진 않을테지만
그러기까지 아마 수많은 판단부족과 시행착오를 겪으며 가슴앓이를 하게 될게다.
그래도 그건 네가 선택한 걸거고, 그럼으로 달게 안아야 할 순전한 네 몫의 고통일테니...


그리고 나서 그 해 얼마후 녀석은 졸업을 했다, 아니 졸업장 없는 졸업을 했다.
이듬해 겨울, 크리스마스 카드가 날라왔다, 크리에이티브 헤어스타일라며
학원 급우들과 울긋불긋한 별난 모습으로, 얼굴 한가득 웃음 담은 행복 넘쳐 보이는 사진과 함께

제니퍼란 이름으로.

 

 

 


- 엘리 –